은행채 발행 막히고 요구불예금 이탈

예·적금 등 수신금리도 못 올리게 압박

당국, 규제완화로 '자금조달 불만' 달래

자금시장의 돈맥경화를 풀기 위해 은행들이 긴급 구원투수로 나섰지만 자금조달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은행들도 유동성 공급 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5대 금융지주사가 이달 1일 95조원의 유동성 공급 계획을 밝혔고 그 중 90조원을 은행들이 공급하겠다고 했지만 이달 들어 시장에 투입된 신규 자금 규모는 금융당국의 예상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29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은행들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은행채 발행 재개를 논의하고 있으며 은행채 발행으로 마련된 자금이 채권시장과 단기금융시장 안정에 투입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단기금융시장에 투입된 은행의 잔액 규모가 늘기는 했지만 기업어음(CP) 등을 신규 매입하는 규모만큼 증가하지는 않았다"며 "기존에 투입된 자금이 회수되면서 순증가액이 크게 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은행들의 유동성 공급을 독려만 할 수는 없고 최대한 애로사항을 반영해 풀어줄 수 있는 규제는 풀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채권시장 안정을 위해 은행채 발행을 자제하라는 금융당국의 주문이 있은 이후 은행채 발행을 사실상 전면 중단했다. 전북은행이 이달 초 발행한 1000억원을 제외하면 시중은행들이 신규로 발행한 은행채는 없다. 반면 만기가 도래한 은행채는 상환해야 하기 때문에 은행들로서는 자금의 신규 조달이 막히고 유동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은행들은 또 금융당국이 수신금리 경쟁 자제를 당부하면서 그동안 예·적금 확대를 통한 자금조달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은행들이 수신금리를 올리면서 2금융권 등의 시장 자금이 은행으로 쏠렸고, 2금융권은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하는 고금리 상품을 쏟아내면서 수신금리 경쟁이 치열해졌다. 수신금리 인상이 결국 대출금리 인상으로 이어지면서 금융당국이 제동을 건 것이다.

실제로 연 5% 이상으로 올랐던 시중은행들의 예·적금 금리는 금융당국의 당부 이후 4%대로 하락했다. 은행채 발행이 막힌 상태에서 예·적금을 통한 자금조달 마저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예·적금의 급격한 증가로 은행들의 유동성이 증가한 것은 맞지만 수시입출금 예금(요구불예금)이 급격히 빠져나갔다. 올해 들어 10월까지 은행 정기예금은 187조5000억원 늘었지만 은행 요구불예금은 96조8000억원 감소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리가 낮은 요구불예금이 줄고, 높은 금리의 예적금이 늘면서 은행들로서는 수익성이 떨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요구불예금은 은행의 핵심 예금이라서 수익성에도 중요하다"며 "일정비율 이상으로 유지가 돼야 하는데 상당히 많이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금융권에서 유동성이 줄어들지 않은 곳은 은행들이 유일하다. 시중 자금이 마르면서 은행을 제외한 다른 금융권역의 유동성은 전체적으로 감소했다. 타 금융권은 다들 은행에 손을 벌리고 있다. 보험사들은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증권사들은 CP 매입을 요청하고 있다. 여신전문금융회사(카드·캐피탈) 등에 대해서는 은행들이 신용공여한도(크레딧라인)를 유지하고 있다.

자금조달 통로는 점차 막히고 있지만 유동성 공급을 확대해야 하는 은행들로서는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

금융당국은 규제완화를 통해 은행권이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하는 상황이다. 금융위는 지난달 20일 은행의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 정상화를 6개월 유예하고, 26일에는 예대율(원화예수금 대비 원화대출금 비중) 규제를 100%에서 105%로 완화하는 조치 등을 단행했다.

LCR은 '30일간 예상되는 순현금 유출액 대비 고유동성 자산 비율'을 의미한다.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85%로 완화했던 규제를 올해 연말까지 92.5%로 정상화해야 하지만 이를 내년 6월말까지 늦춘 것이다. 은행들은 LCR 규제가 정상화될 경우 그만큼 예금과 국공채 등 고유동성 자산을 늘려야 하는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시장에 공급할 유동성 여력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LCR 규제는 바젤위원회에서 정한 것으로 국내 금융당국의 재량권이 크지 않다. 정상화 조치를 유예했지만 장기간 규제를 완화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예대율 규제는 금융당국의 재량권이 있는 만큼, 금융위는 28일 정부의 자금을 재원으로 하는 11종류의 대출을 예대율 산정시 대출금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기금 대출 등 11종이 제외되면 예대율은 0.6%p 축소돼 8조5000억원 규모의 추가 유동성을 은행들이 확보할 수 있다.

은행들의 은행채 발행이 재개되면 자금조달이 보다 원활해질 수 있지만 또 다시 채권시장의 자금을 빨아들일 위험성도 크다.

권대영 금융위 상임위원은 "은행채는 현재 채권 시장이 좀 안정되는 측면이 있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고 수요도 좀 다르니 이런 부분들도 고려해서 충분히 논의하겠다"며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은행채의 발행 방법에 대해 고민을 충분히 하고 있고, 어느 시점에서 공개해서 연말에 은행들의 애로가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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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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