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혜현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 국제지역대학원

중남미의 지정학적 현실을 가장 잘 나타낸 표현은 아마도 '미국의 뒷마당'일 것이다. 미국은 먼로독트린과 지정학적 운명을 이용해 유럽으로부터 중남미를 고립시키고 영토 경제 군사적 팽창을 통해 중남미를 자국의 영향권 안에 가두었다.

20세기까지 미국은 미주대륙에서 체제 그 자체였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중남미의 군사정부 혹은 독재정부를 용인했고, 과두세력과도 계속해서 협력했다. 그리고 필요할 때면 주권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냉전의 종식으로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면서 중남미에서 외부세력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졌다. 유럽은 동유럽 재건에,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 강화에, 그리고 중국은 국내 경제성장에 몰두하면서 미국은 중남미의 최대 무역상대이자 투자자로서 완전한 힘의 우위를 누렸다. 1990년대 중남미는 선거민주주의로 정치적 안정을 회복했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새로운 발전모델로 채택했다. 중남미는 미국의 안보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안전한 뒷마당이 됐다.

지난 12일 파나마 수도 파나마시티에서 열린 제7회 에너지위크 모습. 중남미 국가들이 에너지 상황을 전략적으로 진단하고 각종 기회와 도전과제에 대한 해법을 함께 모색하는 자리다. 사진 EPA=연합뉴스


'미국신화' 붕괴와 '중국신화'의 탄생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책이 사회적 분배에 실패하면서 중남미 전체가 빈곤 실업 및 사회적 불평등 악화로 극심한 혼란과 위기에 빠졌다. 9.11 사태 이후 미국은 중동에 몰두했고 중남미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새로운 역내외 행위자가 중남미에 등장했다. 브라질과 베네수엘라가 미국 중심의 역내질서에 도전하고 좌파 정부의 연속적인 집권으로 중남미 국가들 간 결속력을 강화하면서 점차 미국은 중남미 문제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무역 투자 금융이 중남미 엘리트들을 중국 편으로 끌어들였다. 특히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중국의 역할과 위상이 강화되면서 '미국 외 대안이 없다'는 오래된 미국 신화가 깨지고 '미국이 아니어도 중국이 있다'는 새로운 신화가 탄생했다. 미국 입지는 점점 더 좁아졌다.

지난 6월 미국 LA에서 개최된 제9차 미주정상회의 초청국 명단을 둘러싼 미국과 중남미 국가들 간의 불화는 중남미가 더이상 미국의 뒷마당이 아님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미국은 비민주적인 국가의 정상 배제 원칙에 따라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대통령을 초청명단에서 제외시켰다. 이에 멕시코의 로페스 오브라도르, 아르헨티나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칠레의 가브리엘 보리치, 볼리비아의 루이스 아르세, 온두라스의 시오마라 카스트로 등이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난했다.

멕시코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볼리비아 그레나다 세인트키츠네비스 정상들은 '모든 정상이 참여하지 않는 정상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다'며 대리인을 보냈다. 미국은 트럼프행정부 이래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를 '폭정의 3인방'으로 규정하고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외교적 고립정책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최근 '핑크 타이드'(pink tide, 좌파 물결) 재부상으로 좌파 정부들 간 결속력이 강해지면서 중남미 국가들이 미국의 정책에 순응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미국 마음대로 중남미 정책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의 뒷마당'이 된 중남미

최근 일각에서는 중남미가 '중국의 뒷마당'이 됐다고 말한다.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중국이 브라질에서 '사지 않고' 브라질에서 '사들이고 있다'면서 중국의 자본 침투를 우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남미 국가들은 자국의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과 해외로부터의 투자 자금 유치를 필요로 하기에 시장과 자본 모두를 가지고 있는 중국의 존재감은 앞으로도 더욱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중국은 2015년부터 중남미 현지 기업을 인수 합병하는 방식으로 투자를 하고 있다. 페루의 구리와 철광석 광산,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리튬 광산, 브라질의 전력회사 등 주로 에너지와 광산 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지난 2000년 중국과 중남미 간 무역은 중남미 전체 무역의 3%에 못 미치는 120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2021년에는 전체무역의 15%인 4300억달러로 증가했다. 중남미 전체 무역에서 미국의 비중은 감소하는 반면 중국은 증가 추세에 있다. 현재의 추세가 계속되면 중남미에서 미국과 중국 간 격차는 더욱 좁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2022년 현재 중국은 중남미의 두번째 무역상대국이지만, 대미 무역비중이 큰 멕시코를 제외할 경우 첫번째 무역 상대국이다. 이미 브라질 칠레 페루를 포함한 9개국의 최대 무역상대는 중국이 됐다. 앞으로도 중국과 중남미의 무역은 증가할 것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 원자재 수입국이고, 중남미 국가들은 원자재 수출에 비교우위가 있기 때문이다.

자원과 지정학으로 미중 영향력 넘기

미중 전략경쟁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중남미에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중남미 지역질서를 미국 중심으로 재확립하기 위해 '아메리카 성장'(Growth in the Americas)구상, 중남미판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라 할 수 있는 '경제적 번영을 위한 미주 파트너십'(APEP), '2030 미국·카리브 해 파트너십', '남미·카리브해 재생에너지 이니셔티브'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민간자본 동원이 핵심이기 때문에 국가가 직접 재원을 동원하는 중국보다는 열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쿠바와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를 일부 완화하긴 했으나, 본질적인 제재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제재 완화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남미 국가들은 새로운 가치사슬이 형성되고 기후변화 대응으로 산업이 재편되고 있는 미중 경쟁의 파고를 자원과 지정학을 수단으로 넘으려 하고 있다. 아마존을 공유하고 있는 국가들은 '아마존협력조약기구'(ACTO)를 중심으로 결속력을 강화해 세계 환경의제에서 지역의 목소리를 높이려 하고 있다. 또 미래를 위한 핵심 자원인 리튬 국가들은 '리튬OPEC'을 구성해 세계에너지전환의 역학을 활용하려 한다.

미국과 근접한 멕시코와 카리브해 국가들은 미국의 니어쇼어링과 공급망 재편의 지정학적 기회를 통해 경제성장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상대적으로 미국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아르헨티나는 중국의 세력 발판인 '브릭스 플러스' 가입을 지렛대로 지정학적 긴장을 역이용하려고 하고 있다.

한때 '신으로부터는 너무 멀고 미국으로부터는 너무 가깝다'고 한탄했던 중남미 국가들은 이제 어느 누구의 뒷마당도 아닌 자신들의 마당을 만들기 위해 지정학적 위기를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손혜현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 국제지역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