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 대구대 교수,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불만의 겨울'이 다시 돌아왔다. 지난달 15일 영국의 간호사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스코틀랜드를 제외하고 잉글랜드와 웨일스, 북아일랜드 간호사들이 거리로 나왔다. 비슷한 시기 구급차 응급 의료인력과 철도 노동자, 출입국관리국 직원들도 파업에 나섰다. 이들은 두자릿수 물가상승률에 한참 못 미치는 임금에 대한 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일부에서는 1978년 겨울이 다시 돌아왔다며 걱정이 많다.

1978년 11월부터 1979년 2월까지 철도와 우체국, 응급 의료인력 등 영국의 공공노조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3개월 간 파업을 벌였다. 당시 제임스 캘러헌 노동당정부는 수십번 협상을 벌였으나 접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노동당정부는 1979년 3월 말 불신임 투표로 붕괴됐다. '불만의 겨울'은 그해 5월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총리 집권에 기여했다. 대처는 집권 후 치밀한 계획을 짜 단계별로 노조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대규모 민영화를 단행했다.

무료건강보험(NHS) 최악의 위기

42년이 지난 2022년 12월 영국에서 '불만의 겨울'이 다시 시작됐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간호사들의 사상 첫 파업이다. 1916년 간호사노조가 설립된 후 처음이다. 이들은 지난달 15일과 20일 오전 8시부터 12시간 파업을 벌였다. 1월 18일부터 이틀 간 파업이 지속된다. 간호사들은 물가상승률보다 5%p 높은 임금인상률을 요구한다. 정부는 4%p 정도의 임금인상률을 고집한다.

지난해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11% 정도로 추산된다. 정부 안에 따르면 간호사들의 실질임금은 7% 줄었다. 그만큼 물가상승이 가파르다. 2012년부터 10년 간 영국 간호사 실질임금은 6% 줄었다. 민간부문보다 두배 정도 하락폭이 크다.

2020년 3월부터 근 2년 간 영국은 코로나19 대처에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증원이 없었기 때문에 간호사들이 고군분투했다. 유고브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영국민들의 2/3가 간호사와 앰뷸런스 의료인력의 파업을 지지한다. 통계에 따르면 간호사 인력 4만7496명이 부족하다. 간호사들 가운데 18%만 "환자를 보호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북아일랜드에서 간호사 파업이 벌어졌지만 스코틀랜드 상황은 달랐다. 보건 업무는 자치정부 권한이다. 스코틀랜드민족당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간호사 임금을 7% 올려줘 파업을 면했다.

간호사 파업은 영국이 겪는 어려움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영국이 자랑하는 무료 건강보험(NHS) 상황이 심각하다. 1948년 NHS가 도입된 후 의료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해 고령화 비율이 높아졌는데 정부 투자는 턱없이 부족하다. 긴급수술 환자를 제외한 병원 치료 대기자수는 지난해 1월 460만명을 기록했다. 같은 해 11월 말 720만명으로 폭증했다. 치료를 기다리다 병세가 나빠진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구급차 긴급 의료인력의 파업 참여로 상황은 더 악화됐다. 지난해 11월 병실에 입원하기 위해 12시간 넘게 응급실에서 기다린 사람은 3만7837명으로, 1년 전 같은 달(1만646명)과 비교해 무려 355% 증가했다. 지난달 파업의 영향으로 지난해 마지막주 잉글랜드에서는 앰뷸런스 이용 환자 중 20%가 1시간 이상 기다려 겨우 응급실에 갈 수 있었다. 영국응급의학협회 에이드리언 보일 회장은 "파업과 대기시간 증가로 일주일에 300~500명 정도 사망자가 더 늘어날 전망"이라며 정부에 시급한 해결책을 요구했다.

서민들의 삶 개선될 조짐 안보여

각 분야에서 임금인상 요구는 봇물처럼 넘치는데 영국정부는 뾰족한 방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경기가 최악이다. 영국경제는 지난해 3분기부터 침체에 접어들었다. 영란은행은 최근 경기전망에서 내년 상반기까지 경기침체가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골드만삭스의 최근 전망치에 따르면 영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은 -0.7%로 유럽연합(EU) 0.6%보다 0.9%p 낮다. 영국은 서방선진 7개국(G7) 가운데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의 경기를 여전히 회복하지 못한 유일한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리시 수낙 총리가 취임한 지 채 3달이 지나지 않았다.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에 "어렵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지난 4일 NHS 위기 해결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했을 뿐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팬데믹 기간 2년 동안 영국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15.1%에 달했다. 전시가 아닌 평상시 기준으로는 역대 최대 적자다. 정부가 이미 돈을 너무 많이 푼 탓에 추가지원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돈주머니가 얇아지자 영국정부는 경기침체 속에서도 증세를 단행했다. 법인세를 19%에서 25%로 6%p 올렸다. 정부 지출은 최대한 줄일 예정이다. 당초 2년 간 지원하기로 한 에너지 요금 보조도 6개월째가 되는 올 4월 조기 종결한다. 가구당 최소 220만원이 넘는 돈을 지원하는데 이게 3개월 반 후면 대폭 줄어든다. 극빈층에게만 유사한 혜택이 제공된다.

벌써부터 서민의 생활이 너무 어려워졌다는 아우성이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전쟁이 장기화되면 영국은 경기침체 속에서 물가가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할 듯하다.

영국 경제가 이처럼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된 것은 팬데믹과 함께 우크라이나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의 급등,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 영향이 크다. 영국 교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EU와의 교역은 감소하는데 이를 만회할 대체시장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제2 교역 상대국인 미국과의 교역은 대 EU 교역의 1/3에 불과하다. 바이든 대통령 집권 시기인 2025년 1월 초까지 영국과 미국의 FTA 체결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뒤늦은 브렉시트 후회, 재가입은 불원

영국 유권자들은 뒤늦게 브렉시트를 후회한다. 유고브의 설문조사를 보면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브렉시트는 잘못된 결정'이라는 의견이 51%로, 잘한 결정이라는 의견보다 17%p 높았다. 영국이 EU를 탈퇴한 건 2020년 12월 31일이다. 이후 약간의 변동이 있었지만 브렉시트에 대한 후회 여론은 지속적으로 높았다.

2016년 6월 23일 브렉시트 국민투표 직전 설문조사에서도 영국인들은 'EU를 탈퇴할 경우 경제에 마이너스가 된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이민을 통제하고 주권을 환수하기 위해 브렉시트를 감행했다. 앞으로도 수년간 브렉시트 결정이 계속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아직도 브렉시트 강경지지자들은 그 영향을 과소평가한다. 이런 강경기류가 계속되고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극심한 국론 분열로 진통을 겪으면서 EU 재가입 거론은 금기가 됐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EU와 교역을 하던 중소기업들을 탐방해 브렉시트 후 EU 시장에서 점차 손을 떼고 있음을 보도했다. 무관세 무쿼터로 EU와 교역을 하지만 통관절차가 도입돼 별도의 인력이 필요하고 비용과 시간이 더 걸린다. EU 회원국일 때에는 아무런 통관 없이 자유롭게 교역했는데 이젠 불가능하다.

복합위기에 처했는데 정치적 리더십은 턱없이 취약하다. 원래대로라면 내년 상반기 총선이 치러질 예정이다. 그러나 영국인 과반이 위기타개책으로 조기 총선을 원한다. 제1야당인 노동당 지지율은 집권 여당 보수당보다 24%p 앞선다. 지난해 10월 말 관리형 총리가 된 리시 수낙이 대패가 뻔한 조기 총선을 결단할 리 없다. 조기총선을 하려면 의회의 2/3가 합의해야 하기 때문에 큰 이변이 없다면 예정대로 내년 상반기 총선이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1978년 '불만의 겨울'이 영국에 큰 정치적 변화를 초래했지만 이번 겨울은 아직 그러지 못할 듯하다. 불만을 잠재우려면 정치가 변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혼란만 가중될 것이다.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안병억 대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