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혜현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 국제지역대학원

많은 전문가와 연구기관들이 일제히 2023년 중남미 경제에 대한 암울한 전망치를 내놓았다. 미국 중국 유럽연합의 경제성장률이 모두 둔화되고 원자재가격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중남미 성장률을 지난해 절반밖에 안되는 1.8%로 전망했다. 빈약한 경제성장은 더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할 것이다. 시민들의 요구를 효과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증가하면서 포퓰리즘 양극화 권위주의가 득세하고 민주주의는 더욱 허약해질 전망이다. 특히 중남미는 오랜 권위주의의 전통을 가진 지역이어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후퇴한 지역

1980년대 중남미의 민주주의 전환은 외채위기로 인한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발생했다. 1998년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의 당선을 시작으로 2000년대 중남미에 '핑크 타이드'(연속적인 좌파정부의 집권)가 몰아쳤다. 이 역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초래한 빈곤 실업 불평등 문제를 집권당이 해결하지 못하면서 벌어졌다. 사람들은 정부와 정치인에 대한 불만으로 거리에 나왔지만, 대부분은 민주주의 채널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찾았고 이 때문에 선거 변동성이 증가했다.

그러나 2014년 원자재 호황이 끝나면서 사람들은 경제적 충격과 공공서비스 결핍, 치안 불안, 대통령과 정치인의 부패스캔들, 국가의 무능력과 문제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는 정치인에 분노하고 좌절했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최적의 정치체제로 여기지 않게 됐으며 국가가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버렸다. 민주주의는 유지되고 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는 크게 하락했다.

현재 중남미는 지난 30년 중 가장 심각한 경기침체와 민주주의 쇠퇴를 겪고 있다. 정당과 제도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는 낮은 수준이며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 사회계약은 이미 정통성을 상실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중남미의 2022년 민주주의 지수를 10점 만점에 5.79로 평가했다.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크게 퇴보한 지역이었다.

중남미에서는 우루과이 코스타리카 칠레만 '완전한 민주주의'로 분류됐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 멕시코 볼리비아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는 '하이브리드', 그리고 쿠바 베네수엘라 아이티는 '권위주의 체제'로 분류됐다. 민주주의 지수가 가장 가파르게 하락한 나라는 아이티 엘살바도르고 멕시코였으며, 페루와 브라질은 완만하게 하락했다.

브라질에서는 룰라 대통령이 취임한 지 1주일 만인 올해 1월 8일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추종자 수천명이 대선결과에 불복해 대통령 집무실과 국회의사당, 대법원을 습격했다. 선거 패배 이후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후임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추종자들은 도로점거 시위를 전개했고 선거 이후 두달여 동안 육군본부 앞에서 군의 개입을 촉구하며 천막농성을 벌였다.

이번 선거는 코로나19 대응 실패와 백신 관련 부패스캔들로 현직 보우소나루 대통령에게 불리했고, 야당 룰라 후보에게는 대승이 예견됐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룰라는 1차 투표에서 과반을 획득하지 못하고 결선투표까지 갔으며 결선에서 1.8%p라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보우소나루 후보를 이겼다. 보우소나루는 예상 밖으로 선전했다. 이미 선거 전부터 보우소나루는 전자투표시스템의 결함을 지적하며 선거불복 가능성을 시사했고,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하자 부정선거를 강력 주장하면서 군부 개입을 촉구했다.

보우소나루 추종자들이 원하는 것은 룰라 대통령 퇴진과 보우소나루의 권력 복귀다. 이번 브라질 사태는 정치·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단순한 불만 표출이 아니다. 브라질에서 정부 기관과 제도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5년 동안 대통령 6번 바뀐 페루

페루의 사례는 조금 다르다. 페루에서는 경제위기나 선거 결과가 아닌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불신이 컸다. 2021년 선거에서 페드로 카스티요는 결선투표에서 케이코 후지모리를 0.25%p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앞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케이코 후지모리 측이 개표 과정에서의 부정행위 의혹을 제기하면서 페루에선 개표 후 40일 넘게 대통령을 결정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페루 의회는 1년 반 동안 카스티요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협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 탄핵을 시도했다. 지난해 12월 7일 의회를 해산하고 법령통치를 시도했던 카스티요 대통령은 결국 의회에서 탄핵됐고 직후 반란혐의로 투옥됐다. 부통령인 디나 볼루아르테가 대통령직을 승계함에 따라 페루는 5년 동안 대통령이 6번이나 바뀌는 극도의 정치불안에 빠졌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카스티요 석방, 의회 해산, 조기선거 실시, 볼루아르테 현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정부군이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현재까지 6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정부는 질서유지를 이유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사회통제를 강화했다.

현재 페루의 정치적 위기는 정치체제의 본질에 있다. 페루 의회는 권위적인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탄핵을 통해 대통령 파면을 비롯해 행정권을 제한할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는 현실적으로 불안정하고 허약한 행정부의 탄생이었다. 정당시스템의 파편화로 원내 12개 이상의 정당이 있으며, 이로 인해 어느 한 정당이 과반수를 달성하기 어렵다. 따라서 의회 내 지지기반이 없으면 집권당은 국정운영이 어렵다. 예를 들어 카스티요 대통령은 130석 의회에서 겨우 15명의 지지를 받았기에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페루는 민족 인종 계급 지역 간 균열이 크고 양극화가 심한 나라로 그동안 수도 리마의 소수 엘리트가 정치를 지배했다. 그런 나라에서 역사상 최초로 가난한 시골 출신 대통령이 등장했는데, 국민의 80%가 불신하는 의회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퇴출시키자 이에 분노한 남부의 농민들과 원주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페루는 2000년대 이후 중남미에서 최고의 경제 성과를 일궜지만 페루인 다수가 성과의 결실을 분배받지 못했다. 페루인들은 민주주의를 통한 번영을 기대했다. 민주주의가 복지 건강 교육 주택과 좋은 일자리를 가져다주고 보다 공정한 분배를 보장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경제적 분배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가 국민 동의 없이 제거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고 있다.

엘살바도르는 1992년 중미평화협정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30년 동안 부패는 심화됐고 경제성장은 오로지 해외 송금에 의존했으며 범죄조직의 살인과 폭력은 도를 넘었다. 나입 부켈레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감옥 지자체 의회 대법원 등 국가기관에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제 엘살바도르 국민은 위태로운 민주주의를 옹호하지 않으며, 부켈레의 권위주의에 박수를 보낸다. 권위주의가 엘살바도르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시민들의 믿음이 커지면서 나라 전체가 권위주의로 빠르게 퇴행하고 있다.

정부 통치능력 부재가 권위주의 강화로

중남미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권위주의를 강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정부의 실망스러운 통치능력이다. 경제 부진, 소득 불평등, 빈곤, 공공서비스 결핍, 사회적 배제, 치안 불안, 부패스캔들, 법치 부재 등 형편없는 통치에 지친 국민들은 민주주의체제에 등을 돌리고 있다. 오늘날 중남미가 직면한 최대 도전은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 시민의 권리를 더 많이 존중하는 민주주의다.

손혜현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 국제지역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