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 대구대 교수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지난달 말 기준으로 긴급한 수술 등을 제외한 병원 치료 대기자수는 700만명을 넘었다. 10년 전과 비교해 영국인 평균수명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직장암이나 유방암에 걸린 영국인의 생존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거의 최저 수준이다. 이 통계는 NHS가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지난달 6일 영국 런던에서 찰스 3세의 대관식이 열렸다. 입헌군주제를 가진 유럽의 여러 나라 가운데 영국만이 아직도 대관식을 거행한다. 영국 정부가 공개하지 않았지만 화려한 대관식 비용은 1억파운드, 약 1600억원 정도가 지출된 것으로 언론은 추정했다.

21세기 세습왕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으나 그래도 영국 왕실은 위기 때마다 국민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왕실보다 더 자랑스럽게 여기는 게 있다.

바로 무료 건강보험 NHS다. 영국인의 '국민종교'라 불리는 이 건강보험이 다음달 5일이면 75살이 된다. 사람의 나이로 친다면 노쇠해졌을 때이지만, NHS는 아직도 건재하다. 그러나 치료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좀더 유연한 조직으로 바꾸는 개혁이 필요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실현한 NHS

1945년 7월 초 실시된 총선에서 노동당이 압승했다. 2차대전 때 여야 정치인이 함께 참여한 거국내각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한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은 패배했다. 당시 클레멘트 애틀리 당수가 이끈 노동당은 '미래를 맞이하자'는 구호로 유권자들에게 변화를 약속했다. 이 공약의 중심에 NHS가 있었다.

1946년 발효된 국민보험법은 질병과 실업 등 어려움에 처한 시민에게 소득을 보장해주는 종합적인 사회보험이다. 그리고 1948년 국민보건법(National Health Services Act)이 제정됐다. 이 법에 따라 국민 모두가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근로자들은 급여에서 일정 비율의 기여금을 납부하고 나머지는 국가가 재정을 투입한다.

우리나라와 독일 등 상당수의 국가에서는 근로자와 고용주가 의료보험을 분담하고 국가도 일부 부담한다. 그만큼 영국의 NHS는 국가 부담 비중이 높다.

그런데 전쟁 직후 영국 경제가 어려울 때 복지국가의 기틀이 마련됐다. 1차대전으로 영국은 국가 총자산의 15%를 잃었고, 2차대전으로 나머지의 28%를 상실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필요했기 때문에 이런 법이 제정됐다.

복지부장관으로 NHS 도입에 결정적 역할을 한 어나이린 베번은 "NHS 도입 때 소요 재정을 면밀하게 계산했다면 무료진료 체제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42년 발표된 '베버리지 보고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했다. 국민의 질병과 실업, 재난 등에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당은 이런 비전을 제시해 총선에서 압승했고 보수당은 이를 내켜하지 않았다. 이후 민영화를 적극 실천한 마가렛 대처 총리조차도 NHS의 근간을 건드리지 못했다.

지난달 글로벌 리서치기업 입소스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0%가 지금처럼 NHS가 무료로 운영돼야 한다고 했고, 또 84%는 지금처럼 기여금을 납부해 운영돼야 한다고 했다. 70%는 NHS가 '고장났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틀을 유지하되 제대로 기능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응답이 대다수였다.

고령화 심화에 700만명 넘는 치료 대기자

영국 하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오후 총리가 출석해 주요 정책 현안을 두고 야당과 설전을 벌인다. 여야의 주요 정치인 모두 준비된 원고를 읽지 않는다. 갈고 닦은 토론 실력을 보여주는 '배틀'이 펼쳐진다. 주요 정책의 핵심과 논쟁을 충분히 이해한 후 문제점을 지적받으면 대안을 제시한다.

이런 '총리에게 묻는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NHS 대기자수다. 팬데믹이 거의 종료된 지난 1월 리시 수낵 총리는 NHS 대기자수 축소를 5대 우선 정책의 하나로 발표했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긴급한 수술 등을 제외한 병원 치료 대기자수는 700만명을 넘었다. 사상 최고치다. 지난해 1월 460만명보다 52%p 늘었다. 30만명은 요양 평가를 받기 위해 대기중이고, 250만명은 아파서 실직 상태에 있다.

10년 전과 비교해 영국인 평균수명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직장암이나 유방암에 걸린 영국인의 생존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거의 최저 수준이다.

이처럼 대기자수가 폭증한 것은 NHS 투자가 폭증하는 의료수요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령화율도 크게 늘었고, 더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25년 간 85세 이상 영국인은 두배 정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만큼 치료 대기자수가 더 늘어나고 환자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도 급증할 게 뻔하다.

정부의 공공서비스 지출이 1파운드라면 건보에 38펜스, 즉 공공 지출의 38%가 NHS에 투자된다. 정부 예산의 우선순위가 건강보험이다. 그럼에도 영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건보 지출 비중은 프랑스나 독일보다 낮다. 2020년 말을 기준으로 독일은 GDP의 12.8%, 프랑스는 12.2%를 건강보험에 지출하지만 영국은 11.9% 정도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NHS에 더 지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순위 분야를 바꿔 추가로 지출하는 게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영국의 경우 입원환자 치료에 들어가는 비중이 미국 다음으로 높다. NHS 지출의 47%가 입원환자 치료에 들어가는데, 이는 프랑스의 44%, 독일은 33%에 비교할 때 꽤 높다.

동네의원을 찾는 환자의 절반과 상급병원에 입원하는 환자의 70%가 당뇨와 고혈압, 관절염 같은 만성질환에 시달린다. 이런 환자는 큰 병원에 입원하기보다 동네의원에서 장기간 치료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하지만 건강보험예산의 8%만 여기에 지출된다. 2005년 11%에서 크게 줄었다. 또 입원환자 치료에 들어가는 지출의 10%가 생의 말년을 맞은 사람들에게 쓰인다. 이들에게는 장기입원보다 요양병원 같은 곳이 더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따라서 이코노미스트는 사후약방문 격으로 환자치료에 지나치게 중점을 둔 현재 시스템을 질병예방에 둬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야 예산을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NHS 대기자 수도 줄일 수 있다고 봤다. 마찬가지로 중앙집중식으로 돼 있는 NHS 조직도 권한을 과감히 분산해 유연한 조직으로 바꿔야 한다는 전문가의 견해를 소개했다.

경제성장 더뎌 NHS에 투자여력 없어

정부가 NHS에 더 투자하고 효과적으로 돈을 쓰려면 경제성장이 필수다. 그런데 영국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하다.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로 영국 무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EU시장과의 교역이 줄었지만 이를 만회할 대체시장을 아직 찾지 못했다.

영국은 서방선진 7개국(G7) 가운데 코로나19 이전의 경제 규모를 회복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영국 경제성장률을 마이너스 0.3%로 전망했다가 최근 0.4% 플러스 성장으로 수정했다.

그러나 지난해 물가상승률이 10%가 넘은 데 이어 지난 4월 물가도 8.7% 상승을 기록했다. 에너지·식료품 등 가격변동률이 큰 품목을 제외한 근원물가가 6.2%나 돼 영국 경제의 물가상승 압력이 상당함을 보여줬다. 이에 따라 시장은 현재 4.5%인 기준금리가 올해 말 5.3% 정도까지 인상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물가상승률은 치솟는데 임금은 그만큼 오르지 않아 NHS 기여금 인상도 쉽지 않다.

여기에 부족한 의료인력 충원도 만만찮다. 의료인력의 9% 정도가 채워지지 않았는데,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불어닥친 반이민정서 때문에 EU 회원국 출신의 의료진 채용이 쉽지 않다. NHS는 75년 전 건강보험의 모델을 제시했지만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

안병억 대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