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진 코트라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실리콘밸리를 상징하는 인물의 흔적을 좇으면서 마주하는 한계는 필자가 기업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멋들어진 회사 하나를 창업하고 수많은 수익을 내는 기업가면 좋으련만 이는 필자의 깜냥을 넘어선다. 하지만 제품과 서비스로 세상을 뒤흔든 이들의 마음에는 누구보다 관심이 많다.

돌이켜보니 첫 근무지인 이란에서 일하면서 짬을 내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은 '기업가정신'이었다. 이란 테헤란대학교 경영대는 '중동 최초 기업가정신 과정 개설'(The First Faculty of Entrepreneurship in the Middle East)을 슬로건으로 내세운다. 물론 페르시아어로 진행되는 강의를 제대로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수업 중 대한민국의 1세대 창업가를 연이어 다뤘던 순간만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필자는 한국 굴지의 기업 창업주와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한국인이라는 사실 하나로 몇주 내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해야만 했다. 이란 동료들의 쏟아지는 눈길이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얼굴이 붉어진다. 새삼 현시대 대한민국의 위상을 생각해볼 수 있었고 그만큼 한국인으로서 행동거지를 조심해야겠다는 마음도 품게 됐다. 선배세대의 업적이 강렬한 만큼 지구 곳곳에는 지켜보는 눈이 많아졌다.

기업가정신은 엄밀히 말하면 혁신가정신

이란에서 기업가정신을 공부하며 내린 결론은 기업가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창업가 혹은 사업가가 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말로는 일반적으로 기업가로 번역하는 'entrepreneur'는 라틴어 'entre'와 'prendes'가 단어의 뿌리다. 각각 '헤엄쳐 나가다'(swim out)와 '포착·이해'(grasp)를 뜻한다. 어원학 관점에서 entrepreneur를 바라보면 꼭 좁은 의미의 기업가 창업가 사업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동태적으로 계속 헤엄쳐 나가며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 정태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을 포괄한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기업가정신으로 지칭하고 사용하는 개념을 엄밀히 살펴보면 '혁신가정신'에 보다 가깝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기업가정신이 아닌 혁신가정신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내가 만든 회사가 필요한 것은 아닐 테다. 이란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이 점 하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일과 삶에서 혁신가정신을 적용하기 위해 혁신부터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겠다. 혁신이란 무엇인가. 필자가 정의하는 혁신의 필요충분조건은 둘이다. 과정에서 끊임없는 갱신이 있어야 하며 결과적으로는 갱신이 누적되면서 표준과 접근법이 바뀌어야 한다. 둘 중 어느 하나만 가지고 혁신이라 부르기는 궁색하다.

말과 글에 관심이 많은 필자가 꼽는 21세기 최고의 혁신적 연설은 2005년 6월 12일 스탠퍼드대학에서 스티브 잡스가 한 졸업식 축사다. 손꼽히는 달변가인 그가 고개를 숙이고 준비한 원고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읽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했을지 궁금했다. 잡스의 축사는 육성으로 퍼져 나갔지만 즉흥성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말보다는 정제된 글에 가깝다.

실제로 그랬다. 잡스는 졸업식 축사를 의뢰받고 6개월 간 준비에 매달린다. 2005년 1월 15일 첫 초안을 자신의 이메일 계정으로 보낸다. 이후 자기 자신과의 교신이 수십차례 계속된다. 심지어 그는 졸업식 당일 아침까지도 자신이 쓴 원고를 다듬었다. 세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혁신가도 장막 뒤에서는 끝없는 수련을 지속했음을 알 수 있다.

하버드대 교수인 클레이튼 크리스텐센이 만든 용어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은 달콤하게 들리지만 현실에서 혁신은 대부분 점진적 갱신 끝에 결실을 맺는다.

한두개 장점을 극대화하는 혁신가

올해 상반기 필자는 일터에서 우리 반도체 기업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매년 7월 샌프란시스코 전시장 '모스코니'(Moscone)에서는 세계적인 반도체산업 전시회 '세미콘 웨스트'가 열린다. 모스코니센터는 2007년 1월 애플이 처음 아이폰을 세상에 발표한 곳으로, 실리콘밸리의 기술산업 혁신을 상징한다.

올해 '세미콘 웨스트'는 7월 11일부터 사흘 동안 모스코니센터에서 진행됐다. 반도체산업을 둘러싼 국가 간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지고 코로나19 안정 후 본격적으로 재개되는 오프라인 전시회라는 점 때문에 프로젝트 실무 총괄자로서 부담이 매우 컸다.

7월이 되면 마지막 그림이 어떻게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림을 그리는 방식과 자세에 대해서는 철저한 공감과 이해를 구하고 시작했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만큼 실리콘밸리 혁신가들의 접근법을 직간접적으로 차용하기로 했다.

'비즈니스위크' 기술 전문기자로 활동한 리처드 브랜트는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를 다룬 책 '원클릭'(One Click)에서 '실리콘밸리 정신'을 정의한다. 그는 책에서 "실리콘밸리 정신이란 되는 일은 밀어붙이고 안되는 일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밀고나갈 때와 접어야 할 때를 아는 것"(The key is to know when to hold and when to fold)이라고 말한다.

비슷한 관점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기업가정신을 강의하는 팀 페리스는 그 자신이 창업가이자 벤처투자가다. 포춘(Fortune)은 2016년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독창적 혁신가'로 그를 선정했다. 페리스는 베스트셀러 '타이탄의 도구들'(Tools of Titans)에서 자신이 인터뷰한 혁신가들의 특성을 규정한다. "그들은 모두 걸어다니는 결점투성이로, 단지 한두개의 강점을 극대화했을 뿐"(They are nearly all walking flaws who've maximized 1 or 2 strengths)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이를 준비 중인 프로젝트에 적용해 생각해보니 힌트는 우리가 무엇을 잘하는지, 여기서 무엇이 되는지를 알아내 극대화하는 데에 있었다.

우선 세미콘 웨스트 전시회에 한국관을 꾸려 참가하는 것은 확정됐으므로 이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전시회 앞뒤로 의미있는 행사를 기획해 추진하면 '대한민국 반도체 주간'(K-Semicon Week)으로 선포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봤다. 거창한 선포식을 하지 않아도 임팩트 있는 행사가 3번 정도 연달아 진행되면 참가자들이 자연스레 '반도체 주간'으로 인식하리라 예상했다.

전시회 개막 며칠 전 반도체산업 콘퍼런스로 운을 띄우고, 전시회에 한국관을 꾸려나가며, 한·미 국가 리셉션을 개최해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비즈니스 상담을 하며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각각 행사의 내부 코드명은 촉각 세우기, 널리 알리기, 기반 다지기로 정했다. 반도체산업이 태동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동향 변화에 촉각을 세우고, 대한민국 반도체산업의 가치를 널리 알리며, 한국과 미국의 산업협력 기반을 다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반도체주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우리의 취지를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하자 운도 따르기 시작했다. 거물급 인물들이 관심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반도체산업 사전 콘퍼런스에 세미콘웨스트 주관사 회장과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담당하는 미국 상무부 국장이 연사로 참석했다. 모두 자비를 들여 비행기를 타고 오렌지카운티와 워싱턴D.C.에서 날아올 정도로 프로젝트에 힘을 실어줬다.

사람이 많은 만큼 질문의 수준도 높았다. 연사들이 진땀을 빼는 순간도 여럿 있었지만 프로답게 능숙하게 대응했다. 건강한 긴장감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우리의 의도를 잘 이해해줬다. 고마웠다. 이제 반도체주간은 끝났다. 환희로 가득 찼던 어제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오늘이다. 다시금 실리콘밸리 혁신가의 접근법을 빌려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