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 대구대 교수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키어 스타머 노동당 당수는 취임한 후 급진파를 예비내각에서 물러나게 했다. 노동당의 정책 중심도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처럼 중도로 옮겨왔다. 대안을 제시하며 비판하는 책임있는 야당의 모습을 보여줬기에, 경기침체에 지친 유권자들이 이제는 정부를 바꿔볼 때라며 노동당을 더 지지하고 있다.

'토니 블레어가 돌아왔다.' 최근 영국 언론은 노동당의 전 총리 토니 블레어(1997~2007년 총리 재직)가 노동당 인사들과 부쩍 만남을 늘리며 활동하는 모습을 집중 분석하고 있다.

1990년대 좌우를 아우르는 '제3의 길'을 구호로 제시해 각광을 받던 그는 2003년 이라크전쟁 때 미국과 함께 주권국가를 침략했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일부로부터 백안시당한다. 런던의 몇몇 고급식당에서는 음식을 팔지 않겠다며 그를 문전박대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집권가능성이 높아진 노동당이 전 당수와 가까워지며 유권자들에게 변화된 노동당 모습을 각인시키려 한다.

노동당, 총선 대비해 블레어와 화해

정당의 목표는 정권획득이다. 그래야 자신들이 원한 정책을 실현할 수 있다. 영국 노동당은 2010년부터 야당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집권 보수당이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단행해 영국 경제는 지난해 서방선진 7개국(G7) 가운데 최저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올해 경제성장률도 0.4% 정도로 여전히 저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다 보니 노동당 지지율이 1년 넘게 보수당보다 15~20%p 정도 앞선다. 따라서 내년 안에 치러질 총선에서 노동당은 만년 야당 신세에서 벗어날 확률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총재는 과감하게 토니 블레어 전 당수에게 접근했다.

지난달 18일 런던에서 글로벌변화연구소(Institute for Global Change)가 주최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토니 블레어가 총리 퇴임 후 이 연구소를 운영해왔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영상메시지로 국제정세를 진단했다. 또 구글이나 메타 등 쟁쟁한 빅테크기업들도 이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 스타머 노동당 당수와 토니 블레어는 공개석상에서 악수하며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블레어는 "절멸의 위기에서 노동당을 변화시켜 정권획득에 다가서게 하는 놀라운 일을 했다"며 현 당수를 추켜세웠다.

블레어는 노동당보다 보수당에서 후한 평가를 받아왔다. 보수당은 토니 블레어에 대해 "노동당이 배출한 최고의 보수당 총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블레어 정책 가운데 상당수가 보수당의 정책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블레어는 1997년 총선 압승 때 '범죄 강력대처' '공공서비스 개선'을 전면에 내세웠다. 보통 범죄에 대한 강력대처는 보수당이 애용하는 총선공약인데 노동당이 과감하게 이를 사용했다. 또 과다 복지지출 등 큰정부라는 낙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정 서비스의 효율성 개선도 공약으로 제시했다. 블레어는 자신의 정책을 새로운 노동당 혹은 노동당의 현대화라는 의미에서 '뉴 레이버'(New Labor)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변화에 힘입어 그는 2001년과 2005년까지 3번의 총선에서 내리 승리했다. 2차대전 후 노동당 총리 가운데 3번 연속으로 총선에서 승리한 이는 그가 유일하다. 더구나 노동당은 1979년부터 18년 간 만년 야당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블레어의 3연속 승리는 더욱 값어치가 있었다.

당시 노동당은 총선 승리를 위해 단결하는 듯 했지만 블레어의 노선 변화에 반대하는 인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블레어는 노동당 당헌 4조에 규정된 주요 산업 국유화를 폐기하는 등 당내 과격파와도 일전을 불사했고 이런 게 작용해 10년간 총리로 일할 수 있었다.

스타머, 급진파 통제하며 중도노선으로

키어 스타머 현 노동당 당수도 얼핏 보면 블레어와 유사한 코스를 밟아왔다. 변호사 출신의 그는 우리 검찰과 비슷한 기소청장 출신으로 2015년 53세로 런던의 한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야당이 집권을 대비해 꾸리는 예비내각에서 그는 이민과 브렉시트부를 각각 맡았다. 제레미 코빈 당수가 2019년 12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이듬해 4월 그는 노동당 당수가 됐다.

평생을 급진 노동당 의원으로 활동한 코빈 전 당수 시절 노동당은 급진적인 정책을 내세웠다. 2019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기업 주식의 10%를 노동자에게 이관하겠다고 공약했다. 또 그는 노동당 안에서 불거진 반유대주의 언행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스타머는 취임한 후 급진파를 예비내각에서 물러나게 하고 반유대주의에 강력하게 대처했다. 전임자의 총선 공약이었고 인기가 있었지만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대학등록금 폐지 공약도 폐기했다. 이처럼 그는 점차 당의 정책 중심을 중도로 옮겨왔다. 대안을 제시하며 비판하는 책임있는 야당의 모습을 보여줬기에, 경기침체에 지친 유권자들이 이제는 정부를 바꿔볼 때라며 노동당을 더 지지하게 됐다.

그런데 노동당은 내놓을 만한 명확한 정책비전이 아직까지 부족하다. 보수당은 지난해 11%가 넘은 물가상승률을 이유로 증세를 연기해왔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전쟁이 야기한 에너지가격 급등으로 정부의 시민 지원은 급증했기에 재정상황이 좋지 않다. 따라서 시기만 문제일 뿐이지 증세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증세가 총선에 별로 유리할 게 없기 때문에 노동당도 계속해서 말을 아껴왔다.

스타머 당수는 올 초 범죄 강력대처, 재생에너지 초강대국, 그리고 G7 회원국 가운데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겠다는 정책 우선순위를 내놓았다. 지난 수년 동안 영국이 G7 가운데 최저성장률을 기록했기에 경기침체를 극복할 획기적인 정책을 제시하려 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실행방안은 보이지 않는다.

토니 블레어의 보좌관을 지낸 선거전략가 존 멕터난은 최근 파이낸셜타임스 기고에서 키어 스타머 현 총재에게 '당헌 4조 폐기의 순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블레어가 구노동당의 상징이었던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과감하게 폐지해 '뉴 레이버'를 보여줬듯 스타머도 그와 비슷한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후위기 대응에서 한발 뺀 집권 보수당

반면 보수당은 최근 기후위기 대응에서 한발 후퇴하는 정책을 발표해 총선에 대비하고 있다. 지난 6월 말 실시된 런던 인접 지역구의 보궐선거에서 자동차 환경오염 유발세에 반대한 보수당 후보가 유력 노동당 후보를 물리치고 하원의원에 당선된 게 계기가 됐다.

리시 수낵 총리는 지난달 31일 북해유전과 가스 신규시추 허가를 발급하겠다고 밝혔다. 2019년 당시 보수당정부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넷제로)을 달성하겠다며 야심찬 기후위기 대응책을 내놓았다. 따라서 북해유전과 가스개발 신규 허가는 최소로 발급하거나 늦춰 허가하는 방안이 유력했으나 이를 번복한 것이다. 경제가 어렵고 물가상승률이 지난 6월 7.9%를 기록해 여전히 높다. 그래서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하기 어렵다는 게 보수당 정부의 설명이다.

해외시장 조사기관인 유고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시민들의 70%가 넷제로를 지지한다. 그러나 넷제로 달성에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고 할 때에는 25%만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의 역할은 추가 비용을 유권자들에게 정직하게 설명하고 기존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수당은 지지자 규합을 위해 좀더 손쉬운 '기후위기 대응책 한발 후퇴'를 선택했다.

해외개발원조(ODA) 축소도 마찬가지다. 보수당은 유엔이 권고한 국민총소득 대비 0.7% ODA 지출을 2014년 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경제가 어려워지자 이 법을 개정했고, 지난해 말 영국의 ODA 규모는 국민총소득 대비 0.55% 정도로 크게 줄었다.

브렉시트 후 영국이 비전으로 제시한 '글로벌 영국'의 모습에서 멀어지는 모습이다. 1년 조금 더 남은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과 노동당의 정책 경쟁은 앞으로 더 치열하게 전개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