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아프리카중동연구부장

본래 미국은 핵합의를 통해 이란을 중립지대로 끌어다놓고 사우디와 이스라엘을 연결시키는 중동 안정화를 꾀했다. 그리고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면 지정학적 전략게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미국의 시도는 실패했다. 역으로 사우디가 중립지대로 이동했다. 판세는 중국 우위가 확연했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외교게임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진영을 넘나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교행보가 여기저기서 포착된다. 본격적인 게임의 시작은 지난 3월 10일 사우디와 이란의 국교정상화 선언부터였다. 역내 패권 경쟁자이자 서로 적으로 여기는 두 나라의 국교 정상화 소식은 놀라웠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것은 이 합의가 타결된 시간 장소, 그리고 중재자가 중국이라는 것이었다.

사우디와 이란 양국 대표 사이에 왕이 외교부장이 서 있었다. 이 그림은 무척 생소했다. 그동안 중동의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는 자리에는 항상 미국이 중재역을 자임해왔다.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협정을 합의한 캠프 데이비드에는 카터 대통령이 서 있었다.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평화를 다짐하던 오슬로협정 때는 클린턴 대통령이 중재자였다. 2020년 아브라함협정은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했다. 그러나 이번 사우디-이란 수교 복원에는 중국이 가운데 있었다. 처음이었다.

미국에 한방 먹인 사우디-이란 정상화

타이밍도 심상치 않았다. 이날은 중국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열리던 날이다. 마침 시진핑의 3연임이 확정되는 시기였다. 장소도 베이징이었다. 이날 중국이 중재 발표한 메시지에는 이번 합의가 주권존중과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입각해 이뤄졌다는 내용이 담겼다. 2월 보아오포럼에서 시진핑이 발표한 글로벌안보구상의 핵심원칙과 일치했다. 누가 봐도 중국이 대표적인 친미 우방국인 사우디를 끌어들여 중동의 두 강국을 품는 장면이었다.

이를 목도한 미국의 전략가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카네기재단의 중동전문가 아론 밀러는 미국의 '항행의 자유' 작전에 힘입어 사우디가 중국과 동아시아에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온 대가가 결국 이거였느냐며 배신감을 토로했다. 하버드대학교의 스티븐 월트 교수는 미국이 진영론으로 중동을 편가르기 하며 편파적으로 움직이는 동안, 중국은 모두와 경제협력을 맺는 관계를 유지했기에 중재자의 지위를 획득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존스홉킨스대학의 발리나스르 학장 같은 이는 아예 중국의 승리로 평가했다.

반면 국제위기그룹의 카림 사자푸르나 워싱턴연구소의 헨리 롬 같은 연구자들은 중국의 중재역할에 회의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중동의 복잡한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할 때 군사자산 전개 없이 중국이 중동의 숱한 분쟁을 어떻게 중재하겠느냐는 입장이다. 섣불리 발을 디뎠다가는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이렇듯 다양한 평가와 의견이 엇갈리며 쏟아질 만큼 미국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만큼 베이징합의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평이 어떻게 갈리든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미국이 중동에서 발을 빼고 인도·태평양으로 중점을 옮긴 힘의 공백상태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였다. 70년 넘게 안보와 석유를 교환하며 든든한 우방으로 있던 미국이 중동을 떠날 조짐이 명확해지자 사우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다만 사우디가 미국의 진영을 떠나 아예 중국에 경도될 것인가는 미지수다. 향후 사우디의 행보는 미중 전략경쟁의 구도가 중동 지역질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결정할 핵심 변수이기도 하다.

본래 미국은 핵합의를 통해 이란을 중립지대로 끌어다놓고 사우디와 이스라엘을 연결시키는 중동 안정화를 꾀했다. 그리고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면 지정학적 전략게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바이든정부가 이란과의 핵합의에 계속 실패하자 결국 이란은 중국 영향권에 더 깊이 들어갔다. 동시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에 대한 인권문제 압박으로 인해 사우디도 미국과 이격되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의 시도는 실패했다. 역으로 사우디가 중립지대로 이동했다. 판세는 중국 우위가 확연했다.

다만 이 상황은 중국의 적극적 중동 진출 전략과 의지로 이뤄졌다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사우디 빈살만 왕세자의 게임이 만들어낸 결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이제 사우디는 미중경쟁이라는 환경을 자국 이익 극대화를 위한 기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사우디 입장에서는 안보가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그러나 미국 외에 어떤 강대국도 사우디 왕실이 원하는 수준의 안보협력을 제공하기 힘들다. 중국의 역량을 볼 때 요원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미국의 역린을 건드리면서 미국으로부터 얻어낼 것을 얻어내는 게임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중, 팔레스타인 대의 내세워 존재감 과시

사우디가 중국에 급격히 가까워지면서 놀란 미국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블링컨 국무장관과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및 여타 고위직들이 연이어 사우디를 방문, 설득에 나섰다. 목적은 사우디를 이스라엘과 수교시키는 것, 즉 아브라함협정의 완성을 통한 친미 우방 결속이었다. 사우디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일 듯하면서 조건을 내걸었다.

외신에 따르면 민수용 핵개발 관련 미국의 기술지원과 협력을 요구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핵개발의 단초가 될 사안이며 자칫 중동 전역이 핵 도미노에 빠질 수도 있다. 미국이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기에 대체할 만한 다른 지원책, 즉 고도의 전략자산 배치 및 최첨단 방공망 구축 등을 고심하는 듯하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는 미국에게 선제적으로 선물도 안겼다. 대만 대외무역발전협회 리야드 사무소를 열었고, 사우디 제2국영 항공사인 리야드 에어는 설립발표 이틀 만에 보잉 드림라이너 72대 구매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사우디의 복안대로 움직이는 듯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이 또 나선다. 6월 14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을 베이징으로 초청, 시진핑과 정상회담을 개최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은 팔레스타인이 1967년 빼앗긴 국경을 다시 회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선언했다. 팔레스타인의 수도는 동예루살렘이어야 한다는 언급도 빼놓지 않았다. 이 요구는 딱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아랍권이 늘 주장해 온 내용이고 중국도 대략 아랍 편을 들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중국의 입장 표명이 원론적인 지지였다면, 이번 선언은 중국이 중동의 중재자역을 자임하며 공세적으로 내어놓은 것이기에 눈길이 간다.

미국 입장에서는 고약하다. 사우디와 이스라엘을 아브라함협정으로 묶어내려 동분서주하던 차에 나온 중국의 팔레스타인 편들기이기 때문이다. 사우디 왕실도 당혹스럽다. 중국이 천명한 이번 원칙론을 이스라엘 수교를 위한 전제로 해야 할 상황이다. 대중들의 감정 때문이다. 왕실이나 권력층이 아닌 아랍의 일반 대중들은 2020년 아브라함협정으로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수단 모로코가 차례로 팔레스타인 형제를 배신하는 모습에 내심 속상했다.

그러나 각국 지도자들이 팔레스타인 대의를 내려놓고 실익을 좇는 분위기라 속으로만 떨떠름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이 선명한 아랍 팔레스타인 대의를 선언하니 반색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과 가까이 지내려던 다른 아랍국가들도 속도조절을 고민해야 한다. 선언 하나로 중국은 품들이지 않고 사우디와 미국의 관계에 일부 제동을 걸고 아랍에서의 존재감을 높였다.

사우디·이란의 미중갈등 이용 다음수는

최근 미국은 이란과 대화를 추진하며 양국 수감 국민 교환을 의제로 미니딜을 성사시켰다. 이를 통해 중국과 이란 사이의 틈을 찾아내려던 터에, 중국은 팔레스타인을 잡아채며 미국의 사우디 끌어들이기에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이 와중에 이란 외무장관은 사우디를 방문, 빈살만 왕세자를 테헤란으로 초청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구도를 사우디와 이란이 어떻게 활용하는지 다음 수순이 궁금해질 정도다. 바야흐로 치열한 수 싸움이 전개되는 외교의 시대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