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미국이 막는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한 자금을 돌려줄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은 주권국가로서 외교를 포기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란이 보기에 한일 양국은 똑같이 열렬한 친미 국가이고 굴종한다고 느낄 정도로 미국 말을 잘 듣지만 두나라의 태도는 달랐다. 대장금과 주몽, 삼성 엘지 현대차가 닦아놓은 '좋은 나라' 한국 이미지는 정치인들의 무관심과 무지로 한없이 추락했다.

우리은행과 IBK기업은행에 묶여 있던 이란 동결자금 60억달러가 마침내 이란으로 넘어갔다. 엄밀히 말해 카타르 금융기관의 이란계좌로 이체 완료된 것이다. 합법적인 이란 자금을 우리나라가 미국을 설득해 넘겨준 게 아니라, 미국이 스파이 혐의로 잡혀 있는 5명의 미국인을 데려오기 위해 우리나라 금융기관에 동결된 자금을 이란에 주라고 한 것이다.

당연히 주었어야 할 돈을 줘 속은 시원하지만 '동맹국' 한국의 애간장을 다 태워 이란의 대한 감정을 최악으로 만들더니, 자국이 급하니까 우리은행과 IBK기업은행의 이란 돈을 풀게 한 미국의 셈법은 몹시 불편하고 불쾌하다.

이체 완료와 동시에 이란이 붙잡고 있던 미국인을 카타르로 보내 돈과 사람을 맞바꾸는 작전이 끝났다. 그러나 우리와 이란 사이에는 여전히 남은 것이 있다. 바로 우리에 대한 이란정부의 좋지 않은 감정이다. 이란은 미국과 합의한 대로 동결자금을 인도적 물품을 사는 데만 써야 한다. 우리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다면 이란은 우리 기업의 물품을 살 것이다. 그러나 이란은 "한국산 제품을 절대 사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구매 물품 명단에 한국산은 없다.

이란 의회는 지난 8월 동결자금과 관련해 국제중재에 우리나라를 회부하는 정부 법안을 통과시켰다. 60억달러가 들어왔지만 동결자금 때문에 약 7억달러 손실이 발생했다고 보고 이를 받기 위해 국제중재 절차를 지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쌓인 이란의 반한 감정을 해소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미국 제재에 허물어진 이란 한류의 꿈

2002년 이란 핵개발 의혹이 처음 불거진 이후 2011년 12월 31일 미 오바마 대통령이 의회를 통과한 6620억달러 규모의 국방수권법안에 서명하면서, 이란 중앙은행과 거래하면 미국 금융기관과 거래할 수 없게 됐다. 원유 수입량의 9.6%를 이란에서 들어오면서 이란 중앙은행과 거래하던 우리나라로서는 타격이 무척 컸다. 당시 우리는 이란 중앙은행에 계좌를 개설해 원유 수입대금을 지불하고 여기에서 수출대금을 상계처리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국방수권법으로 이란과 달러 거래가 불가능해지자 우리나라는 원화결제 시스템을 고안했다. 이란 중앙은행이 우리 금융기관에 원화 계좌를 개설한 뒤 우리는 이란산 석유 수입대금을 이 계좌에 원화로 지불하고, 우리 기업은 이란 수출대금을 원화로 받았다. 그러나 2019년 5월 트럼프 대통령은 대이란 제재 예외 인정 기간을 종료했다. 트럼프는 "이란은 물론 이란을 도우려는 나라에 경제적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한-이란 간 원화결제 시스템도 완전히 중단됐다. 이란산 원유 수입 전면 금지와 함께 이란 중앙은행의 우리은행과 IBK기업은행 계좌 역시 꽁꽁 묶였다. 이란에 수출하던 2100여개 우리 기업이 수출대금을 받을 길 또한 사라졌다.

'대장금' '주몽'으로 상한가를 치던 한-이란 관계가 본격적으로 악화일로에 들어선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대장금 인기를 두고 이란 국영방송 사장은 "대장금 시청률이 90%인데, 나머지 10%는 원래 티브이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까지 했다. 주몽도 이에 못지않아 이란에서 한국 남자는 '주몽'으로 여자는 '소서노'로 부를 정도였다. 백색가전은 삼성과 엘지 일색이었고, 현대기아차의 인기도 이란 고원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란 제재 앞에서 드라마 백색가전 자동차 한류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쉽게 허물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출구 없는 제재로 우리은행과 IBK기업은행에 묶인 이란 자산은 70억달러에 달했다.(원화가치 하락에다 일부 대금을 남기고 60억달러만 보냈다.) 주한 이란대사는 밤에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본국으로부터 많은 압력을 받았다. 이란주재 한국대사도 시달림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우리 외교 당국자가 이란대사와 인간적으로 긴밀하게 지내며 호소를 들어주고 달랬다. 하지만 우리은행과 IBK기업은행은 이란대사의 호소를 애써 모른 체 했고 면담마저 거부했다.

우리 금융기관은 미국이 무서워 이란정부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정말 말이 안되는 일은 이란 유학생을 대하는 자세였다. 우리 정부로부터 국비 장학금을 받는 이란 유학생도 국내은행에 계좌를 개설할 수 없어 정상적으로 장학금을 받을 길이 막혔다. 우리나라 은행은 미국 금융기관도 하지 않은 이란 유학생, 국내 거주 이란인의 금융활동을 무자비하게 봉쇄했다. 민간차원에서 반한 감정이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 거주 이란인들은 은행계좌 개설 제한을 국가인권위에 고발까지 했지만, 인권위는 은행의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기각했다.

같은 친미국가 일본과 한국의 다른 태도

문재인정부 당시 당국자들은 일본이 왜 이란과 잘 지내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일본과 이란의 관계가 좋은 것은 그만큼 일본이 이란에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일본-이란 관계는 1929년에 시작됐다. 1953년 영국이 이란의 모사데그정부를 압박하며 석유 수출을 막을 때도 일본은 제재를 피해 이란에서 석유를 사올 정도로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타미 대통령은 2000년에, 루하니 대통령은 2019년에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은 1978년 다케오 후쿠다 총리가 이란을 방문한 이래 1979년 혁명 이후에도 정부 주요 인사들이 이란을 다녀왔다. 양국은 상당히 오랜 기간(1974~1992년) 무비자 입국을 허용했다.

이에 비해 우리의 대이란 관계는 경제에만 치중돼 있다. 굳이 정상이 만나지 않더라도 이란에 고위급이나 민간차원의 우호적 인사를 보내 우리 정부가 이란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이란방문이 그나마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 한-이란 간 체결한 MOU가 이행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정상이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 의의가 컸다.

미국의 제재가 심해 이란의 고위급 인사가 방한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하지만, 미국이 막는다는 이유만으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은 주권국가로서 외교를 포기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란이 보기에 한일 양국은 똑같이 열렬한 친미 국가이고 굴종한다고 느낄 정도로 미국 말을 잘 듣지만, 두 나라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대장금과 주몽, 삼성 엘지 현대기아차가 닦아놓은 '좋은 나라' 한국 이미지는 정치인들의 무관심과 무지로 한없이 추락했다.

대 이란관계는 자기반성에서 시작해야

2021년 이란 혁명수비대 해군은 한국 케미호를 호르무즈 해협 공해에서 나포했다. 해상 환경오염 때문이라고 했지만 동결자금 때문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화들짝 놀란 우리 정부가 고위관리를 보내 이란에 문제 해결을 약속했지만 결과적으로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정당한 내 돈이 묶여 있다고 생각해보자.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남의 돈인데 어떻게든지 풀어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리프 외무장관의 말마따나 우리 금융기관은 이란 국민의 음식과 약을 빼앗은 셈이다. 이란의 분노는 정당하다. 엄밀히 말해 동결자금 해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성의의 문제였다. 2019년부터 제대로 성의를 보여주지 않은 우리 정부에 이란정부는 화를 내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란 돈을 잘 보관하고 있다"고 한 정부인사의 말이 불에 기름을 더 부었다.

이란을 대하는 자세를 다시 가다듬을 때다. 돈을 주었는데 왜 여전히 화를 내느냐고 하지 말자. 4년 동안 우리 돈이 묶여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코로나 팬데믹 시기 수많은 사람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데 지원은커녕 우리가 우리 돈으로 약품을 사는 것마저도 상대방이 막았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우리가 이란에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대이란 관계는 자기반성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