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원 CA 변호사·회계사

미국 연방상원 사상 최다선(6선) 여성의원이자 현직 최고령 상원의원이었던 파인스타인(캘리포니아, 민주)이 90세의 일기로 지난달 29일 임기 중 별세했다. 그녀는 1970∼1980년대 샌프란시스코 사상 첫 여성시장을 거쳐 1992년 상원의원에 처음 당선 된 뒤 31년간 재임하면서 상원 정보위원회 첫 여성 위원장, 법사위원회 첫 여성 민주당 간사 등을 거치며 정치권의 '유리천장'(여성에 대한 진입장벽)을 잇달아 깼다.

그녀의 가장 큰 유산은 미국 인권 역사의 어두운 부분인 테러 용의자 심문보고서를 공개한 것이다. 미국정부는 2001년 9.11테러 이후 범죄가 입증되지 않은 용의자들에게조차 물고문을 하고 잠을 재우지 않는 등 잔인한 인권침해를 자행했다. 미 의회는 이런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 등 두 행정부에 거쳐 침묵을 지켜왔다.

하지만 그녀는 2014년 백악관과 중앙정보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원 정보위원회가 작성한 524쪽 분량의 요약본을 공개했다. 그녀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위대함은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며 이를 바로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보고서 공개로 정치적 역풍에 시달려야 했다.

파인스타인 의원이 지난달 29일 90세의 일기로 임기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필자는 3년 전 87세의 일기로 재직 중 사망한 긴즈버그 대법관이 떠올랐다. 긴스버그는 여성권리의 수호자, 사회정의의 옹호자, 진보의 아이콘이라 불린다. 무명의 여성 변호사였던 1970년대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간 6개의 소송 사건 중 5건의 재판에서 승소한 놀라운 여성이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 후 28년 동안 연방대법관 자리를 지켰던 긴즈버그는 췌장암 투병 중 2020년 대법관 현직 신분으로 사망하기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전화로 재판에 참여하는 등 대법관으로서의 직무수행에 적극적이었던 진보진영의 최고참 대법관이었다. 진보진영의 대모로도 불렸다. 고인은 동성애 결혼, 이민, 헬스케어 등의 법안에서 진보측 손을 들어줬다.

선구자 역할 했지만 고령화논란 중심에

한편 고인들은 말년에 고령화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1933년 같은 해 태어난 파인스타인과 긴즈버그는 정치권과 사법권에서 유리천장을 깬 선구자로 여성들을 위한 문을 열어젖혔다. 또 다음 세대 여성들을 위해 현직 신분으로 사망하기까지 그 문을 열린 상태로 잡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임기를 마치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고령주의에 대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파인스타인 의원은 201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6선에 성공했지만 지난해부터 건강이 악화하면서 조 바이든(80) 대통령, 미치 매코널(81)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등과 함께 고령으로 인한 업무수행능력 저하를 이유로 사퇴 압박을 받아왔다.

그녀는 대상포진 합병증 등으로 지난해 연말부터 2개월 이상 상원 회의에 출석하지 못했고, 결국 올 2월 차기 상원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고인이 결국 임기를 마치지 못한 채 현직신분으로 사망하면서 고령 정치인의 직무 수행을 둘러싼 논쟁은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두명의 대법관을 보수인사로 채워 보수로 기운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진보적 목소리를 내왔던 긴즈버그는 췌장종양 외에도 대장암 췌장암으로 치료를 받았다. 그녀는 암이 재발해 화학치료를 받으며 감염 가능성을 우려해 병원에 입원했던 87세 당시에도 대법관직에서 은퇴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그녀는 "나는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한 법원구성원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해 왔다. 나는 여전히 일을 할 수 있다"고 법원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밝혔다. 트럼프정부에서 이미 2명의 대법관이 새로 지명된 상황에서 자신마저 물러나면 보수 일색의 대법원이 될 것이란 우려 때문에 자리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이다.

트럼프정부에서 진보진영이 긴즈버그의 건강에 신중했지만 이전 오바마정부 때는 정반대 분위기였다. 그녀가 1999년 대장암, 2009년 췌장암 발병에 이어 2012·2013년에도 낙상으로 다치자 '다음 정권에서 어찌 될지 모르니 사퇴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새 진보 대법관 임명권을 주라'는 요구가 공공연히 나왔다. 긴즈버그가 거부하자 '나라를 상대로 도박하느냐' '이기적'이란 비판도 일었다.

사망으로 발생한 빈자리 채우기도 논란

개빈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고 파인스타인 의원의 후임으로 미국 최대 여성 정치단체 '에밀리스 리스트' 회장인 40대 흑인 여성 성소수자인 라폰자 버틀러를 지명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법에 따라 임기 중 공석이 된 상원의원의 후임을 주지사가 지명할 수 있다.

개빈 주지사는 "파인스타인 의원의 큰 빈자리를 애도할 때 낙태의 자유, 동등한 보호, 총기 폭력으로부터의 안전 등 그가 싸워왔던 바로 그 자유가 그 어느 때보다 공격받고 있다"며 "라폰자는 파인스타인 의원이 남긴 바통을 이어받아 계속해서 유리천장을 깨고 모든 캘리포니아 주민들을 위해 워싱턴에서 싸울 것"이라고 전했다.

라폰자 지명자는 상원에서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최초의 공개적인 성소수자,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레즈비언 상원의원일 뿐만 아니라 해리스 부통령에 이어 두번째로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흑인 여성이 될 것이다. 라폰자 대표는 다른 여성과 결혼해 딸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라폰자 대표는 2021년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에밀리스 리스트 대표로 임명되면서 주목받았다. 최고령 연방대법관인 긴즈버그 사망 후 그녀의 후임을 둘러싼 논란이 빠르게 불붙었다. 미국 연방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에서 승인한다. 미 대법관 종신제는 건국 초기 평균 수명이 53세 정도일 때 법원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확립된 헌법 조항이다. 요즘 70~80대에 사퇴하는 경우가 많지만 판단력 논란에도 93세까지 재임한 이도 있었다.

2016년 미국 대선 9개월 전 연방대법관 스캘리아가 사망했을 당시, 공화당은 다음 대통령이 정해지기 전까지 상원에서 대법관 후보 심의를 거부한 바 있다. 그래서 긴즈버그의 후임도 11월 대선 후 지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차기 대법관은 이번 대선 이후 새 대통령이 정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상원과 트럼프는 대법관 후보 지명, 인사청문회, 인준투표를 대선 전에 속전속결로 실행해 긴즈버그 후임자로 보수인 배럿 판사를 의자에 앉혔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세상을 떠난 후 맥코넬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대법관 청문회와 인준을 밀어붙이겠다"고 발표했다. 공화당이 다수당인 상원에서 상원의원 표가 51표만 있어도 대법관을 인준할 수 있다. 당시 공화당 상원의원이 53명이었다. 대법관 임명에는 보통 70일이 걸리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대선까지 42일 남은 상황에서 대법관 임명을 강행했다.

여성이 예외적이어서는 안된다

5일 샌프란시스코 시청 밖 파인스타인 추모식 무대에 섰던 거의 모든 사람이 여성이었다. 카멀라 부통령, 펠로시 전 하원의장, 시장 등이 포함되었다. 이는 파인스타인이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여성 시장이자 캘리포니아 최초의 여성 상원의원으로서 거듭 깨뜨린 유리천장을 상기시키는, 의미있고 의도적인 기획이다.

런던 브리드 시장은 "나와 내 또래 등 수백만명의 소녀들이 할머니들이 입었던 멍에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성장했다"며 "고인이 된 상원의원이 길을 보여줬다"고 추모했다.

긴즈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결정이 내려지는 모든 곳에 여성이 있어야 한다. 여성이 예외적인 존재여서는 안된다."

서민원 CA 변호사·회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