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진 코트라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박인환은 시애틀 근처에 위치한 올림피아항(Port of Olympia)으로 정박하는 남해호에서 자문한다. "과연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무엇을 나는 보아야 할 것인가"라고 말이다. 질문이 세계를 규정한다. '무엇이 보이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가'다.

66번 국도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세밀한 준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답사여정을 떠날 때는 커다란 줄기만 잡고 간다. 숙소와 이동수단 정도만 정해두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해결한다. 이게 원칙이다. 힌트는 픽사의 스토리 제작자 매튜 룬에게서 얻었다. 그는 애니메이션 '카'를 제작할 때 떠났던 66번 국도 답사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한다. "조사여행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영감을 줄 수 있다(A research trip can inspire you in unplanned ways)." 여장을 꾸릴 때 세세한 계획은 안정감을 부여하지만 동시에 경험의 폭을 제한한다.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쉽지 않은 문제다. 목적부터 명확히 해야만 했다. 왜 66번 국도를 타려고 하는가. 자신에게 수없이 던진 질문이다.

한마디로 미국을 알고 싶었다. 미국 전역이 너무 큰 대상이라면 서부라도 알고 싶었다. 미국 서부도 너무 크다면 캘리포니아라도 알고 싶었다. 캘리포니아는 '골드러시'의 종착지다. 금을 찾아 떠나온 미국인들의 행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금이 가진 물성(物性)이 아니라 행렬이 상징하는 이동성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미국 서부로 왔다. 기회의 땅 캘리포니아에서 미래 가능성을 끌어올리려 했다.

이 물결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전세계에서 창업으로 일가를 이루려는 이들이 여전히 실리콘밸리로 몰려든다. 현시대 가장 각광받는 기업가 일론 머스크만 봐도 그렇다. 남아공에서 출생한 그는 캐나다를 거쳐 마침내 미국으로 왔다. 1995년 머스크가 처음 창업한 회사 집투(Zip2)의 근거지는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의 56㎡짜리 작은 사무실이었다.

골드러시와 실리콘밸리가 상징하는 것

물고기는 자신이 물에 사는지 모른다고 했다. 어느새 캘리포니아에 거주한 지도 3년이 다 되어가면서 스스로 캘리포니아에 사는 게 맞는지 의구심이 커졌다. 캘리포니아 밖에서 캘리포니아를 바라보는 시각이 절실했다. 도구적 접근통로는 66번 국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품었다. 한정된 미국근무 기간 동안 66번 국도를 운전하면서 꼭 한번 자극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여정을 시작한 지 5시간 만에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의 경계에서 전진은 중단됐다. 렌터카 직원의 제안을 무모하게 받아들인 탓에 난생 처음 전기차를 운전하는 중이었다. 쉐보레 볼트(Bolt)는 목적지로 설정한 충전소를 2㎞ 앞두고 동력을 잃었다. 렌터카 직원은 견인차가 올 때까지 3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토요일 오후 캘리포니아의 동쪽 끝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전날 비가 내린 덕분인지 무지개까지 떠올랐다. 압도적 풍경이었지만 사진 찍을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3시간 동안 손놓고 기다린 것은 아니다. 렌터카 직원에게 너무 오래 걸리니 다른 방법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은 혹시 고속도로 순찰대(Highway Patrol)가 비상 충전용 배터리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가장 가까운 경찰서 번호를 알려줬다. 쉐보레 볼트가 있는 위치를 특정해서 전달하자 십여분 만에 순찰차가 도착했다. 사정을 설명했지만 아쉽게도 비상 충전용 배터리팩은 없었다.

경찰은 경찰답게 최선을 다했다. 그는 점프선을 연결해 보기 위해 애썼다. 물론 전기차로 점프스타트가 가능할 리 만무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통성명을 했다. 경찰관 이름은 다스트(Darst)였다. 다스트는 얼마 전 훈련연수를 받으러 서울에 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경복궁에서 그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한국을 이야기했다.

미합중국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의 경계에서 대한민국과 서울을 이야기하는 일은 제 나름 운치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빨리 가지는 않았다. "계속 있어줄까(Do I stick to you)?"라고 묻는 그의 마지막 말에 "아니, 괜찮다"고 대답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견인차가 도착했다. 충전소까지 2㎞를 끌어서 옮겨주고 렌터카 회사에 320달러를 청구했다. 요금 정산은 나중 문제였다. 전기차를 끌고 다음날 66번 국도를 타는 일은 무리였다. 1시간도 넘게 걸리는 충전을 기다리면서 다시 렌터카 회사와 통화했다. 무엇보다 차를 바꾸는 게 급선무였다. 직원은 애리조나 피닉스 공항으로 가면 24시간 운영하는 지점이 있으므로 차를 바꿔줄 것이라고 말했다.

90분 가까이 충전을 마치고 피닉스까지 갈 전력을 확보했다. 피닉스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아침 9시에 길을 나섰는데 밤 12시에 피닉스 스카이하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가까스로 차를 바꿨지만 66번 국도의 출발지로 설정한 플래그스태프(Flagstaff)까지는 2시간 반이 더 걸렸다. 불행 중 다행인지 숙소로 잡아놓은 에어비앤비 주인장은 문을 잠그지 않고 자겠다고 했다.

66번 국도에서 겪은 수난

네댓 시간 눈을 붙이고 잠을 깼다. 단 하루가 남았다. 험난한 여정 끝에 66번 국도의 출발점에 섰다. 이제부터는 시간을 최대한 아껴 써야 했다. 숙소 주인장에게 고맙다며 "곧 보자(See you soon)"고 인사했다. 그의 대답은 "정말이니(Are you sure)?"였다. 우리는 깔깔댔다.

기분좋게 시동을 걸었지만 장난처럼 시험은 계속됐다. 이번에는 타이어 경고등에 불이 들어왔다. 전기차 충전에 비하면 타이어의 공기압을 보충하는 일은 난도가 매우 낮은 문제였다.

1999년에 통과된 캘리포니아 의회 법안 531은 '주유소는 고객에게 타이어용 공기와 세차용 물을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California law requires every service station to provide free air and water for automotive purposes to its customers)'고 규정하고 있다. 66번 국도 중간중간에 주유소가 보일 때마다 멈춰 서서 새어나간 공기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서는 일을 반복해야만 했다.

70여년 지나서도 유효한 박인환의 질문

시인 김중식은 시 '방랑자의 노래'에서 "머물러도 떠돌아도 보았으나 가보지 않은 곳에 무엇이 있는 게 아니었다"고 읊조린다. 66번 국도라고 해서 무엇이 있는 게 아니었다. 퇴역한 도로답게 노면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직선 도로에 자동차는 딱 한대였다.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길에서 서행과 주행을 반복하면서 대자연의 풍광을 흠뻑 받아들였다. 그리고 회사 선배로 여기는 인물이 던진 질문 하나에 골몰했다.

선배는 다름 아닌 시인 박인환이다.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의 시인 박인환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국영기업인 대한해운공사 직원으로 만 3년 가까이 근무했다. 그는 1955년 3월, 대한해운공사의 상선 '남해호'의 사무장으로 미국 땅을 밟는다. 박인환은 이때의 체험을 정리해 한 일간지에 '19일 간의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박인환은 시애틀 근처에 위치한 올림피아항(Port of Olympia)으로 정박하는 남해호에서 자문한다. "과연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무엇을 나는 보아야 할 것인가"라고 말이다. 질문이 세계를 규정한다. '무엇이 보이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가'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의 지식인이자 직장인, 문학가이자 개척자였던 그가 던진 질문은 70여년이 지난 후 66번 국도에서도 유효했다.

필자가 구하고 싶은 해답은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는 혁신가들의 정신적 원천은 무엇인가'다. 보이는 것을 받아들이기에도 깜냥이 부족한데 보이지 않는 것을 찾겠다고 나선 길이었으니 실마리를 갖고 돌아왔을 리 없다. 하릴없이 19일 동안 체류를 마치고 귀국한 선배의 마음을 되새기는 수밖에 없겠다. "아메리카 전반의 문화 수준은 우리와 비할 수 없으나 우리들이 조금도 정신적으로 뒤떨어져 있다고는 믿고 싶지가 않다"던 1955년 박인환의 다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