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지난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세계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중동평화, 더 나아가 세계평화에 얼마나 중요한지 똑똑히 보고 있다.

2020년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이 이스라엘과 아브라함협정을 맺으며 외교관계를 정상화한 이래 팔레스타인 문제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이 중차대한 안건은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시기조정만 남았을 뿐 사우디아라비아도 결국 이스라엘과 손을 잡을 것이라는 관측이 주류를 이뤘다. 그도 그럴 것이 사우디의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올해 9월 20일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이스라엘이 진심어린 성의를 보인다면 사실 사우디와 이스라엘은 탱고를 출 수 있는 상황에 다다른 분위기였다.

팔레스타인을 지도에서 뺀 네타냐후

9월 22일 유엔총회연설에서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아랍 국가들과 관계를 정상화한 후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했다. 모두들 팔레스타인과 먼저 평화를 이룬 후 아랍국가와 친구가 돼야 한다고 믿지만, 자신은 그 반대의 길을 택했다면서 "그러한 정책이 실현불가능하다는 예상을 보기 좋게 깼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아랍국가와 먼저 친구가 되려는 노력을 팔레스타인이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없이 이스라엘만 적혀 있는 중동지도를 보여주면서 인도-아랍에미리트-사우디-요르단-이스라엘-유럽으로 이어지는 경제회랑을 붉은 선으로 그리며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 지도를 들고서는 적대적인 아랍세계에 둘러싸인 조그맣고 고립된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말했다. 그 지도에도 역시 팔레스타인은 없었다.

10월 2일 이란 외교장관은 7년 만에 대사급 외교를 복원한 사우디와의 해빙관계를 활용해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손 잡는 것을 막겠다고 했다. 다음날 이란의 최고지도자는 패배가 확실한 경주마에 내기를 걸지말라며,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이루려는 노력을 패배가 확실한 요행수에 비유했다.

이미 16년에 걸친 가자지구 봉쇄, 팔레스타인 지역 내 불법 이스라엘 정착촌 확장,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팔레스타인 주민 공격, 이스라엘 극우파의 알아크사 사원 탈취 기도 등을 선제공격의 이유로 삼은 하마스는 이란과 마찬가지로 아랍세계의 대이스라엘 외교 정상화를 위험한 시도로 보았다. 특히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우려에 전격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해 양자대화의 기회를 날려버리려 한 것 같다. 실제 하마스의 공격으로 사우디는 이스라엘과 대화를 중단했다. 공격이 효과가 있었다는 말이다.

신랑 빼앗긴 팔레스타인 인들의 비애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것을 꿈꾸던 유럽의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세계시온주의협회를 창립했을 때 "유대인 국가를 세웠다"고 했던 시온주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팔레스타인을 굳이 고집하지 않았다. 어디든지 박해를 피해 살 수 있다면 좋다고 여겨 영국의 우간다안을 받았지만, 헤르츨이 세상을 떠난 후 폐기됐다.

1897년 시온주의자협회가 만들어질 당시 팔레스타인 현황을 알아보러 간 사람들이 "신부는 아름답지만 이미 다른 남자 품에 안겼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지만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는 뜻이다. 1897년 팔레스타인 인구 구성이 아랍인 96%, 유대인 4%였으니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표현이다.

팔레스타인을 신부에 비유한 발언이 역사적 신빙성이 있느냐는 의문이 있긴 하지만, 1970년 이스라엘 최초 여성총리인 골다 메이르는 이 말을 받아 "신랑이 너무 약해 신부를 뺏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매일 밤 신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주인이 있는 땅을 빼앗았다.

사실 현 네타냐후정부는 팔레스타인 주민과 공존하려는 의지가 없다. 1995년 극우파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함께 살 수 있길 바라며 1993년 오슬로평화안을 채택했고, 이듬해에는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함께 철천지원수와 같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과 손을 잡으며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라빈 총리가 세상을 떠난 후 더 이상의 평화공존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슬로평화안을 '완전한 팔레스타인 독립안이 아니라 미국의 원주민 보호구역과 다를 바 없다'고 비난했지만, 오슬로협정이라도 있었기에 오늘날 팔레스타인자치정부가 존재한다.

하마스의 공격 직후 카타르와 쿠웨이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진단하면서 정책 변경을 요구했다. 그런데 유대인들 중에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압박정책을 오랫동안 꾸준히 비판해온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 지식인 일란 파페는 '인종청소'라는 말을 쓰면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두 몰아내려 한다고 고발한다. 인종청소라고 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주민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땅에서 살지 못하도록 몰아내는 것도 인종청소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다. 가자지구를 이스라엘 허가 없이는 육해공 어느 곳으로도 나갈 수 없는 거대한 감옥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감옥과 다른 점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점일 게다.

진보 일간지 '하아레츠'의 기드온 레비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을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레비는 20대 때 팔레스타인 난민을 취재하면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꿨다. 같은 인간으로서 팔레스타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을 수십년째 이어가고 있다. 말을 하지 않고 듣는 자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마다 슬픈 이야기를 들려준다. 레비는 남아공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아파르트헤이트 국가, 즉 인종차별국가라고 부른다. 실제로 국제사면위원회 국제인권감시기구는 물론 이스라엘 내 비정부기구인 '점령지역 인권 이스라엘 정보센터'는 이스라엘을 인종차별 국가로 규정한다.

시간은 이스라엘정부 편 아냐

하마스의 공격은 뜻밖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을 상대로 벌인 참극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하마스 응징을 명분으로 "전쟁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공격하는 이스라엘군을 보면서 반이스라엘 감정 역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스라엘을 감싸고 도는 미국정부와 달리 미국 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무차별 폭격을 중지하고 휴전하라고 요구한다.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유대계 미국인의 시선이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몹시 차갑다.

하마스가 잘했기에 이스라엘의 공습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같은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측은지심을 보이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심지어 "평화적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들은 폭력적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라는 케네디의 말까지 되살아났다. 하마스가 출현한 건 억압적인 이스라엘정부 탓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는 표현이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하마스 제거작업이 성공할수록 이스라엘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하마스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화를 내고 있다. 시간은 이스라엘정부 편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이겨도 졌다고 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이스라엘, 그리고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은 지금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