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혜현 고려대 연구교수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소

남미 최남단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8번째로 큰 영토를 가진 나라로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 볼리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긴 대서양 해안선과 남극으로 향하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 광활하고 비옥한 팜파스 곡창지대와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매장량의 셰일가스 그리고 이온배터리의 핵심원료인 리튬을 다량보유한 자원부국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탱고, 보르헤스의 문화적 자산을 자랑하는 매력적인 나라다.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20세기 초 곡물과 소고기 수출로 번영을 누리면서 한때 경제력이 세계 10위권에 들 정도로 풍요롭고 강한 국가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아르헨티나 드림'을 꿈꾸며 밀려든 유럽 이민자들로 아르헨티나는 중남미에서 가장 유럽적인 문화와 풍광을 가진 나라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길인 7월9일대로, 죽어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레콜레타 묘지, 신고전주의와 바로크 양식의 고풍스러운 건축물, 웅장한 대저택들은 아르헨티나의 부와 번영을 상징했다.

그러나 1945년 사회권과 노동권 보호를 외치며 등장한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를 중남미 최고의 복지국가로 만들었지만, 국가사회주의 정책으로 재정과 경쟁력을 고갈시켰고, 아르헨티나 정치와 사회를 페론주의와 반페론주의로 갈라놓았다. 페론주의의 집권을 막기 위해 반복적인 군부쿠데타가 발생했고 군부독재의 가혹한 인권탄압으로 3만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비록 국민의 손으로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최근 40년간 4번의 국가부도를 맞으며 경제는 파탄상태가 됐다. 현재 인플레이션은 143%이며, 인구의 40%가 빈곤상태에 놓여 있다. 페소화 가치는 최근 4년간 1000%나 하락했다. 중앙은행 금리는 118%이고 국제통화기금(IMF)에 갚아야 하는 부채만 440억달러다. 재정적자는 GDP의 2.4%나 되고, 무역수지는 만성적자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지독한 가뭄으로 작황이 좋지 않아 역대 최저수준을 기록했다. 페소 가치절하로 최저임금은 중남미 최하위 수준인 150달러다.

미국 존스홉킨스대가 발표한 2022년 고통지수(Misery Index)에서 아르헨티나는 157개 국 중 6위를 기록했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8위)보다 경제적 고통이 심한 나라로 평가됐다. 아르헨티나는 1세기 만에 세계 경제력 10위권의 국가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불행한 나라 6위로 추락했다.

변화에 대한 열망과 징벌 투표

지난 19일 아르헨티나에서는 대통령 결선 선거가 있었다. 극우 성향의 초자유주의 경제학자인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가 56%를 득표해 44%를 획득한 집권당의 세르히오 마사(Srgio Masa)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아르헨티나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게 됐다. 역사적으로 아르헨티나에서는 선거를 통해 극우가 집권한 경험이 없다. 밀레이 신정부의 성공은 페론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선거의 핵심은 '변화'와 '아르헨티나 재건'이었다. 아르헨티나 유권자들은 "모두 떠나라(Que se vayan todos!)"는 구호를 외치며 기득권 정치인들의 퇴진과 새로운 정치질서 구축을 요구했다. 특히 젊은층의 변화 열망이 컸다. 이들은 쇠퇴하는 국가에 대한 기억으로 좌파 정치인에 대한 환멸감이 크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너무 많은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하며, 가치가 떨어지는 페소를 혐오한다. 이들은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국가주의가 아닌 자유주의가 해법이라고 생각하며 밀레이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밀레이를 지지하는 유권자의 50%가 30세 미만의 젊은층이며 이들은 SNS를 통해 밀레이의 이념과 정책을 전파하는 충실한 수호자였다.

밀레이의 승리는 인플레이션과 빈곤, 치안부재, 끊이지 않는 정치인들의 부패에 대한 피로감과 환멸감의 표출이었으며, 무책임하고 성과를 내지 않는 정부를 심판하는 징벌 투표의 결과였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밀레이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인 변화를 선택했다.

밀레이는 누구인가

밀레이는 자칭 초자유주의자로 하이에크 경제학을 신봉하며 도널드 트럼프와 자이르 보우소나루를 숭배하고 전통 정치를 경멸하는 인물이다.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중산층 지역에서 성장했고 사립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투자은행과 대학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학생 시절부터 말투와 이미지가 독특해 '엘 로코(미친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가 유명세를 탄 건 수년 전 TV토크쇼에서 자신을 무정부 자본주의자라고 부르며 중앙은행 폭파, 정치적 계급에 대한 비난, 자유에 대한 요구, 새로운 반공주의 등 우파의 주장을 외치면서였다. 그 인기에 힘입어 그는 202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시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2년 만에 정치적 기반도 없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선거유세 기간에 밀레이가 보여준 행보는 괴기하다 싶은 정도로, 아르헨티나 정치인들의 전형적인 유세방식과는 달랐다. 헝클어진 머리와 가죽 재킷의 록가수 차림에 전기톱을 들고 나타났다. 정제되지 않은 노골적이고 거친 언어로 페론주의 적페청산과 현재와의 완전한 단절을 약속했다. 일명 '전기톱 계획'으로 불리는 밀레이의 공약은 △중앙은행 폐지 △공공지출 삭감 △정부부처 대폭축소 △국영기업 민영화 △연금개혁 △낙태법 폐지 △무기·신체장기 거래 자유화 등 아르헨티나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불만을 쟁점화했다.

난관 예상되는 밀레이 신정부의 개혁

올해 아르헨티나 대선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극적인 선거였다. 예비선거에서 밀레이가 돌풍을 일으켰지만 1차 선거에서 예상과 달리 페론주의의 마사가 약진하며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결선투표에서는 박빙이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12%의 큰 차이로 밀레이가 승리했다.

페론주의가 창설된 이후 아르헨티나 정치에는 페론주의 출신 대통령만이 '통치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뿌리깊은 정치적 신화가 존재한다. 1983년 초대 민선 대통령인 라울 알폰신(Raul Alfonsin) 대통령은 초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임기를 6개월 앞당겨 조기퇴진했고, 중도우파 정당연합의 데 라 루아(De la Rua) 대통령도 대규모 시위에 밀려 임기 중간 헬기를 타고 대통령궁을 탈출하면서 불명예퇴진했다. 2015년 집권한 비페론주의 정당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임기완수에 성공했지만 재선에는 실패했다. 페론주의 힘에 대한 믿음이 국가의 혼란과 위기 때마다 페론주의 생명력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변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냈다.

밀레이가 제안하는 개혁의 핵심은 충격적인 변화이며, 이러한 충격적 의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밀레이 소속정당인 자유당은 전체 상원의석 72석 중 7석을, 전체 하원의석 257석 중 38석만 차지하고 있다. 23개 지방정부 주지사 중 자유당 소속은 한 명도 없다. 시정부 사정은 마찬가지다. 밀레이의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의회를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페론주의 연합이 상하원과 지방정부까지 장악하고 있어 국정운영의 어려움이 예고된다. 밀레이 신정부가 통치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도우파 '변화를 위한 동맹'과 연합정부를 구성해야 하지만 변화를 위한 동맹의 내부분열과 보건·교육개혁, 낙태법에 대한 이견으로 일부는 밀레이를 지지하지 않는다. 게다가 밀레이 핵심공약인 정부지출 삭감, 공기업 민영화, 낙태법 폐지는 사회 주요 세력과의 갈등이 불가피한 부분이어서 대중들의 대규모 시위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변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안고 출범한 밀레이 신정부의 개혁이 순탄치 않아 보인다.

손혜현 고려대 연구교수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