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과 연계해 지배구조가 우수한 기업에 한해 ‘감사인 주기적 지정제’를 면제해주는 방안을 추진한다. ‘주기적 지정제 면제’라는 인센티브를 제시하면 기업 스스로 지배구조 개선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됐다. 하지만 2015년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태를 계기로 도입된 주기적 지정제에 ‘예외’를 두면 회계개혁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에도 기업들의 반발로 인해 주기적 지정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놓고 관련 기관들의 논의가 있었다. 금융당국은 시행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며 정책효과 분석을 위해 당분간 현 제도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런데 10개월 만에 다시 ‘면제카드’를 꺼내들자 기업 밸류업을 명분으로 기업들이 ‘회계개혁’을 빠져나갈 통로를 만들어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강도 높은 회계감사, 비용보다 더 큰 ‘미래 경제적 효익’ 가져다줄 것

주기적 지정제는 상장회사 등이 6년간 감사인을 자유 선임했다면 이후 3년은 금융당국(증권선물위원회)이 외부 감사인을 직접 지정하는 제도다. 주기적 지정제는 외부 감사인이 감사계약의 권한을 가진 기업의 입김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감사를 진행할 수 있게 했지만 기업들은 이에 따른 부담이 크다며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주기적 지정제 면제’라는 인센티브를 제시한 금융당국의 입장은 이렇다. “주기적 지정제를 하는 이유는 감사인을 독립적으로 선임할 수 없는 기업환경이라서 강제적으로 금융당국이 지정하는 것이다. 반대로 감사인을 독립적으로 선임할 수 있는 기업환경을 갖춘 곳이라면 지정을 할 이유가 없다.” ‘주기적 지정제 면제’가 회사들 입장에서는 지배구조를 우수하게 만들 유인책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주기적 지정제 면제’로 기업 밸류업이 역행할 수 있다. 특정 기업에 주기적 지정을 면제해주겠다는 발상은 외부감사를 ‘징벌’ 개념으로 보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밸류업을 측정하는 항목에 ‘가점 요인’으로 지정 감사제를 포함시키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강도 높은 회계감사를 통해 회계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지출되는 감사비용이 더 큰 ‘미래의 경제적 효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악마는 항상 디테일에 있다. 실제로 밸류업 프로그램을 시행할 때 지배구조 우수기업을 어떻게 평가해서 선정할지 두고 봐야 하겠지만 기업들이 지배구조를 바꾸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감사위원회를 독립적으로 운영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기업 지배구조의 실질적인 변화없이 금융당국이 제시한 프로그램을 잘 이행했다고 인센티브를 주는 것은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지정 면제를 위한 구체적 평가기준·방법과 면제방식은 추가 검토를 거쳐 2분기 중 확정하기로 했다. 외부감사법 시행령 개정 등을 추진해 지정 면제 근거를 마련하고 내년 중 지정 면제 평가 및 선정 때부터 실제 적용할 계획이다. 금융당국은 일단 ‘3년 면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배구조 우수기업 선정이 기존 지배구조 평가방식과 비교해 크게 바뀌지 않을 경우 정부의 기업 밸류업 방안은 ‘지정 면제’를 위한 ‘빠져나갈 구멍’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한국ESG기준원이 최근 몇년간 지배구조 최우수기업이라고 선정한 상장사들이 일감몰아주기와 이사회 운영에 문제가 발생하는 등 평가의 신뢰성이 높지 않았다.

실질적인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한국기업의 지배구조 특성을 고려한 실질적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기업의 지배구조 체계에서는 전체 주주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는 소수 주주들의 사적이익을 추구할 유인이 크기 때문이다.

상법 개정 통해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 도입해야

현행 상법 제382조의 3(이사의 충실 의무) ‘이사는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에는 ‘주주’가 없다. 때문에 지금까지 이사들은 회사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일반주주들의 권리침해를 당연시해왔다. 2250만명 국민연금 가입자와 1400만명 증시 참여자들이 피해 당사자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상법 개정을 통한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도입과 밸류업의 주체인 이사회의 독립성 강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4·10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면서 정부가 진행 중인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흔들릴 수 있으나 중·장기적으로는 초당파적 추진이 필요하다.

박진범 재정금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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