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리지 비율 완화, 대손예상 무시 등

범유럽 싱크탱크 '브뤼헐' "바젤 III 위반"

"미국 국익 편협한 고려, 정당화 어렵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따른 금융충격을 막으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와 의회가 은행 관련 규제를 느슨하게 풀었다. 2008~2010년 불거진 글로벌 금융위기 재발을 막겠다며 금융개혁을 약속한 지 10년 만에 뒷걸음질 치고 있다. 벨기에 소재 범유럽 싱크탱크인 '브뤼헐'은 19일 "미국의 조치는 새로운 국제은행자본 규제 기준인 '바젤 III'를 위반한 것"이라며 "국익을 고려한다는 동기에서 비롯됐지만, 글로벌 금융시스템과 미국 자체에 가져올 불이익을 상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연준은 이달 1일 은행의 자기자본을 자산으로 나눠 계산하는 '보완적 레버리지 비율'을 바꿨다. 은행이 보유한 미국채와 연준에 예치한 돈을 레버리지 비율 계산시 총자산에서 빼준다는 것. 기한은 2021년 3월까지다. 분모가 줄어들면서 은행들은 최소 자본비율 조건을 맞추기가 쉬워졌다. 하지만 국채와 예치금을 면제하는 건 바젤 III에서 합의한 레버리지 비율 정의를 벗어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제롬 파월 의장이 지난달 3일(현지시간) 코로나19로 인한 미국의 경제·금융 피해를 막기 위한 긴급 통화정책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미 의회도 별도 법안을 통해 금융규제 완화에 나섰다. 미 의회는 지난달 27일 '코로나19 지원, 구제, 경제안정법'(CARES)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 4014조항에 따르면 은행들은 '당기대손예상액'(CECL)을 계상하지 않아도 된다. 당초 은행들은 올해 1월부터 이 의무조항을 지키기로 했다. 미국 회계기준위원회(FASB)는 CECL을 2016년 채택했다. 그에 앞선 2014년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가 이를 도입했다.

은행들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전망이 급격히 악화되는 상황에서 CECL를 제외하면서 장부손실을 회피할 수 있다. 은행의 자본상황이 장밋빛으로 윤색될 수 있다.

브뤼헐은 "연준과 미 의회의 조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G20가 중심이 돼 글로벌 금융규제 기준에서 미국이 빠지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조짐은 지난해 11월에도 있었다. 연준을 비롯한 연방금융규제기관들은 특정한 거래에서 거래상대방의 신용리스크를 측정하는 기준을 바꿨다. 매우 난해한 조항이 됐다. 선명한 기준을 중시하는 바젤III를 위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물론 미국만 금융규제에서 후퇴한 것은 아니다. 바젤위원회는 2014년 유럽연합(EU)이 바젤III를 '실질적으로 따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거래상대방 신용리스크 측정을 두고 꼼수를 부렸던 것.

미국 금융당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시장이 붕괴하기 전 수년 동안, 이전의 바젤II 협약 채택을 거부했다. 금융위기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진 이유라는 지적을 받았다. 결국 미국은 2008년 말 열린 첫 번째 G20 정상회의에서부터 강력한 금융개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도 임기 첫 3년 동안엔 금융규제 협약을 비교적 잘 지키는 편이었다. 일부 규정을 완화했지만, 국제적 합의로 규정된 최소한의 수준 이상은 유지했다.

"궁극적으로 미국 국익 저해"

미국이 금융규제 조항을 느슨하게 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미국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국제적인 금융건전성 강화는 시장의 안정을 보장하고, 금융 초강대국인 미국은 그로부터 혜택을 입기 때문이다. 전 세계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금융시장을 왜곡하면서 각종 폐단이 불거졌고, 이는 1980년대 첫 번째 바젤 협약을 만든 원동력이 됐다. 브뤼헐은 "연준의 레버리지 비율 조정이 금융시장 안정이라는 장점을 상쇄할 만큼 혜택이 있는지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연준의 규정 완화 동기는, 코로나19 변동성으로 미국채 시장이 교란됐고 그 결과 미국 은행권 내로 예금이 쏟아져 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연준의 셈법은 레버리지 비율 제한을 풀어준다면 은행들이 보다 많은 국채를 사들일 수 있고 보다 정상적인 시장 조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브뤼헐은 "기존의 레버리지 비율 제한이 최근 미국채 시장 출렁임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의문스럽다"며 "몰리는 예금과 관련해 은행들은 그 돈을 국채 매입이 아니라 연준에 예치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은행 보유 국채를 자산에서 배제해주면서 나쁜 선례를 만들 수도 있다. 신용도가 낮은 국채를 발행하는 국가에서도 이를 모방하려는 움직임이 생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은행을 건전하게 만든다는 바젤위원회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미 의회가 통과시킨 CECL 계상 우회 조항도 마찬가지다.

연준의 조치에 대해 미 통화감독청과 연방예금보험공사는 일제히 반대했다. 의회의 법안에 대해서도 미 회계기준위원회(FASB)가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들의 입장은 무시됐다.

브뤼헐은 "관련 기관의 반대 목소리를 무시한 건, 지난 50년 동안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금융을 건전하게 만들자는 국제적 노력을 해친다면, 그 피해는 결국 미국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FASB를 감독하는 금융회계재단 의장은 지난달 하순 미 의회에 보낸 공개편지에서 "당기대손예상액을 계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CARES법 4014 조항을 통과시키지 말아달라"며 "그 조항은 투명하고 독립적인 회계기준을 설정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다. 투명하고 독립적인 회계기준은 시장참가자들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기반이며 미국의 자본시장과 실물경제를 지지하는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썼다.

브뤼헐은 "미국은 최고 수준의 금융기준과 규제를 지지하면서 막대한 혜택을 입었다. 만약 그 기준이 낮아진다면, 미국의 경제적 성취 역시 저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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