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싱크탱크 '브뤼헐'

20년 전만 해도 미국과 유럽 중앙은행들의 관심사는 매우 협소했다. 물가안정에 집중했다. 훗날 영국중앙은행 총재가 되는 머빈 킹은 2000년 "중앙은행의 목표는 너무 지루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0년대 초 유로존 국채위기가 터졌다. 중앙은행들은 새로운 정책수단을 개발하느라 바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내심 과거의 좋은 시절로 돌아가기를 꿈꿨다.

그러나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와 유럽중앙은행(ECB)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이들은 이제 정부의 정책목표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지기를 원한다. 과거엔 회피하려 했던 것이다. 특히 불평등과 기후변화다.

브뤼헐 선임연구원 장 피사니-페리는 24일 '중앙은행들의 과감한 신세계'라는 기고에서 "선출직과 비선출직 공무원 사이에 책임성을 규정하는 선이 있다면, 분배나 공정이었다. 이는 선출직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이젠 아니다"라고 말했다.

연준 제롬 파월 의장은 1월말 '장기목표와 통화정책 전략에 대한 성명서'에서 "연준은 최대 수준 대비 고용의 부족분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전이었다면 '고용의 편차'라고 표현됐던 대목이다.

파월 의장에 따르면 이같은 변화의 이유는 '타이트'한 노동시장이 저소득 공동체와 소수인종에게 혜택이 된다는 깨달음에서다. 노동시장이 타이트하다는 건 구직자 수보다 일자리 수가 많다는 의미다. 즉 총실업률이 매우 낮을 때, 노동시장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일자리와 임금 측면에서 혜택을 볼 수 있다는 것.

물론 중앙은행들은 오래 전부터 '고압경제'(수요가 공급을 항상 상회해 공급이 수요를 뒤따르는 경제상태)가 비숙련, 소수인종에게 혜택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현재 달라진 것은 연준이 그런 임무를 거시경제학 기준에서 정의하는 게 아니라, 집단적인 빈곤퇴치 노력 차원에서 참여하려는 의지를 시사한다는 점이다.

2020년 6월 공개한 '연준이 듣는다'(Fed Listens)에 따르면 연준은 시민들의 의견을 통해 미국 실업률의 하방 한계선을 시험하는 것의 혜택을 확신하게 됐다. 과거의 연준은 정치와 거리를 두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따라서 시민들의 의견을 중히 고려하지 않았다.

한편 ECB는 아직 정책 재검토를 완료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후변화를 적극 지지하는 방안을 고려중이다. ECB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최근 "기후변화와 싸우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영역을 모두 탐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CB 집행이사 이자벨 슈나벨은 채권매입 프로그램에서 '브라운본드'(brown bonds)를 배제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브라운본드는 친환경과는 거리가 먼 기업이 발행하는 채권으로, 그린본드와 대척점에 있다. 프랑스중앙은행 프랑수아 빌레 드 갈루 총재는 담보자산이 탄소배출과 관련이 있다면 평가 가치를 할인하겠다는 점을 시사했다. 녹색자산을 우대하겠다는 건 통화정책 효과를 극대화하는 '시장중립성'에서 탈피하겠다는 입장을 시사한다.

ECB는 또 'EU의 정책을 지지해야 한다'는 일반조항에 무게를 둘 방침이다. 이는 중앙은행의 의무사항이 아니지만 EU 정책의 실행자로 변모하겠다는 것.

정통 통화론자들에게 이는 비판대상이다. 미국 후버연구소의 선임연구원 존 코크런은 "ECB는 자기 스스로 임무를 규정하고 확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독일 분데스방크 옌스 바이트만 총재도 ECB의 움직임에 냉담한 입장을 갖고 있다.

피사니-페리 연구원은 "연준과 ECB가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최소한 일시적으로나마 인플레이션이 사라진 상황에서 어느 중앙은행도 잊혀진 신(물가안정)을 위한 제사장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며 "연준과 ECB의 움직임은 사회적 선호가 높은 사안에 적절히 대응하려는 열망도 보여준다. 기관 존립의 합목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리스크를 수반한다. 당장 연준은 곤경에 처했다. 실업률의 하방 한계선을 시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는 거대 규모의 경제부양책을 꺼내들었다. 물가안정에 위험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있다. 피사니-페리 연구원은 "연준은 어쩌면 때를 잘못 골라 자신의 손발을 묶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ECB의 경우 '기후변화가 금융안정성을 해치는 거대 리스크가 될 수 있다'며 녹색정책 집중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만 설득력을 가진다는 지적이다. 녹색거품이 형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탈탄소 기술에 대거 투자하는 기업들은 '각국 정부가 탄소가격을 계속 높게 설정할 것이기에 녹색투자는 충분히 수지를 맞출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각국 정부는 종종 약속을 어긴다. 때문에 녹색기업에 대한 여신을 적극 확대하는 것 역시 향후 금융안정 리스크를 해칠 수 있다.

피사니-페리 연구원은 "중앙은행들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불평등과 기후변화 위기는 엄청난 도전과제다. 정책기관들이 간과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면서도 "하지만 명확한 절차를 거쳐 임무 규정을 고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그래야 통화정책자들이 자신의 임무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돼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ECB의 경우 현행 EU조약에 따라 대단히 협소한 물가안정 임무를 띠고 있다. 그리고 EU조약은 고치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ECB가 탐험하고 실험하는 건 옳은 방향"이라며 "하지만 어떤 임무에 복무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건 결국 원칙의 문제에 달렸다. 그리고 회원국이 결정할 문제다. ECB가 자체적으로 규정할 게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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