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과 눈맞춤하며 옛이야기 들려주고 때론 안아주며 마음 전해 … "보람된 일 하면서 인생 마무리"

"아이들과 활동하다 보면 웃을 일이 많아요. 할아버지(남편)랑 둘이 있으면 웃을 일이 별로 없잖아요. 아이들과 항상 웃으니까 웃음이 얼굴에 늘 배어있는 느낌입니다."

24일 오후 한국국학진흥원 서울사무소에서 이야기할머니로 활동하는 이영분, 채현자, 황경욱 할머니를 만났다.

이야기할머니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학진흥원이 함께하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을 통해 활동하는 만 56~74세 어르신들을 말한다.

어르신들은 어린이집 유치원 등 전국유아교육기관을 방문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조손교육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24일 한국국학진흥원 서울사무소에서 이야기할머니 3명을 만났다. 왼쪽부터 이영분, 채현자, 황경욱 할머니. 사진 이의종


◆조건 없는 내리사랑 = 이야기할머니들은 할머니의 조건없는 내리사랑을 전해주려 노력한다. 만 3세 정도 되는 어린이들은 할머니들이 오는 시간을 기다리고 할머니들이 들어서면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쏟아놓는다. "엄마랑 아빠랑 싸웠어요." "엄마한테 동생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그 얘기들을 다 들어주고 옛이야기를 들려주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간다.

채 할머니는 비밀을 귀엣말로 말하던 한 남자 어린이가 기억에 남는다. "이제 삼촌에게 '아빠'라고 불러도 된대요." 아이는 그 말을 하면서 신이 났다.

채 할머니는 "아마 어머니가 재혼을 하는 과정에서 아이는 어머니가 만나는 사람을 '삼촌'이라고 불렀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황 할머니는 한 발달장애 어린이가 기억에 남는다. 할머니는 그 아이가 눈에 밟혀 옛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끊임없이 그 아이에게 눈을 맞추는 등 옛이야기에 참여시키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엉뚱한 질문을 많이 하기에 더욱 열심히 옛이야기를 준비해 갔다.

그렇게 수업을 하던 마지막 날, 그 어린이는 수업시간에 이야기할머니와 자신을 그림으로 그리고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할머니, 이건 할머니고 이건 저예요."

황 할머니는 "잘 어울리지 못하던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어요"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유쾌하고 귀여운 어린이들도 있다. 이 할머니는 한 어린이로부터 고백을 받았다. "할머니, 저는 커서 할머니랑 결혼할래요." 꼬마의 당돌한 고백에 당황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린이의 귀엽고 엉뚱한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어린이들이 황경옥 할머니에게 선물한 직접 쓴 편지. 사진 이의종

◆하루 종일 중얼중얼 외워 = 어린이들은 마냥 귀엽고 예쁘지만 이야기할머니 활동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1년에 1500~2000자 정도 되는 34개의 옛이야기를 외워서 어린이들에게 들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암기를 바탕으로 내용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시간이 날 때마다 중얼중얼 외운다.

연수기간 중 받은 교육에서는 "100%가 아니라 170%를 외우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되새기며 산책을 할 때도,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도 옛이야기를 외운다.

할아버지를 앞에 두고 옛이야기를 해 보는 것도 필수다. 황 할머니는 옛이야기를 하러 가기 전날이면 할아버지를 앉히고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일종의 리허설이다.

단순히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어린이들에게 하듯 질문도 해 보고 가끔은 할아버지에게 엉뚱한 질문을 해 어떻게 답변을 하는지 보기도 한다.

옛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어린이 1명, 1명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가장 중시한다. 20~30분 정도의 시간이지만 집중력이 약한 만 3~5세들에게는 한없이 지루하고 긴 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는 이유도 현장에서 아이들과 한번이라도 더 눈맞춤을 하기 위해서다.

이 할머니는 어린이들에게 눈을 맞춰 주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안아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부모에게 안기고 싶은 욕구를 조금이나마 해소해주고 싶어서다. 또 어린이들이 어린이집에서 시간표에 따라 생활하면서 힘들 수도 있는데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이나마 기분전환이 되기를 바란다.

◆사업 공고 보고 심장이 쿵쾅쿵쾅 = 할머니들은 어떻게 이야기할머니 사업에 지원하게 됐을까. 채 할머니는 이야기할머니로 활동을 하기 이전에도 잠자리에서 손녀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녀에게 들려줄 옛날이야기가 다 떨어진 가운데 채 할머니는 새 옛날이야기를 찾아보려 인터넷 검색을 하기에 이른다.

그때 검색하다 알게 된 것이 이야기할머니 사업이다. 공고를 본 채 할머니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야기할머니를 하게 되면 손녀에게 해 줄 이야기가 늘어나는 거니까 꼭 하고 싶었어요."

황 할머니는 빈둥지 증후군을 겪다 이야기할머니 사업을 만나게 됐다. "그때 친정어머니 돌아가시고 큰아들이 장가를 들고 셋째딸이 결혼을 했어요. 뭔가가 쑥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죠. 그리고 제가 요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요양원 일이 어르신의 죽음을 보내드리는 일이에요. 번아웃이 왔죠." 그렇게 요양원을 그만두고 쉴 때, 한 신문에서 이야기할머니 사업 전면광고를 보게 됐다. "아, 이거구나 생각하고 지원했어요."

◆가족들의 응원 속 활동 = 3명의 이야기할머니들은 지금껏 치열한 삶을 살았다. 채 할머니는 공무원과 주택관리사를 거쳐 손녀들을 전담해 돌봤고 황 할머니는 종합병원의 간호사에서 공부방 선생님으로 다시 요양원 간호사로 일을 했다. 이 할머니는 온가족이 해외생활을 하는 가운데 자녀들을 전담해 양육했고 한글학교 선생님으로 봉사했다.

젊은 날을 열심히 살아온 어르신들은 이제 이야기할머니로 제2의 인생을 활기차게 살아간다. 위염이 있던 채 할머니는 이야기할머니 활동을 하면서 위염이 사라졌다. 할아버지들은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할머니들을 데려다주면서 외조를 펼친다. 자식들도 "엄마 이야기 다 외웠어요? 엄마 짱"이라며 이야기할머니 활동을 응원한다.

"정말 보람된 일을 하면서 인생을 마무리하고 있어요. 만나는 어린이들이 나중에 할머니를 생각할 때 마음이 따뜻해졌으면 좋겠습니다."(채 할머니)

"유아들에게 할머니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많이 기쁘죠.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이 달려와 안길 때는 너무 예쁘고 활력이 돼요."(이 할머니)

"제2의 인생을 아름다운 황경욱으로 살고 있어요. 이야기를 외우느라 아등바등 애쓰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며 진땀이 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또 홀가분한 마음으로 유치원을 나올 때, 꽃밭을 걷는 기분으로 나오면서 제가 아름다운 할머니구나 생각합니다."(황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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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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