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재조명해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다. 중앙정부와 전국 지자체들은 기념사업회를 꾸려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지역별로 독립운동가와 역사적 사건, 사적지를 새로 발굴하거나 재조명하고 있다. 지방자치시대에 걸맞게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내일신문은 '3.1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발굴한 독립운동가, 역사적 현장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탑

8일 오후 2시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마을입구로 들어서는 길가에는 벌써 태극기가 휘날린다. 제암리문화관을 지나면 3.1운동순국기념탑(1983년)이 보인다. 이곳이 100년 전 제암교회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기념탑을 주변으로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과 23인 순국묘지 및 상징 조각물, 3.1정신교육관, 스코필드 박사 동상 등이 조성됐다. '제암리3.1운동순국유적'은 사적 제299호로, 대한민국 3대 3.1운동 국가사적지 가운데 한 곳이다.

◆면사무소·주재소 전소, 일본순사 2명 처단 = 기념관 2전시실에서는 '학살, 끝나지 않은 역사'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중국 프랑스 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학살로 희생된 분들과 화성지역 3.1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기념관 관계자는 "지금은 학살을 경험한 피해자는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일제의 참혹한 만행을 기억하는 한 끝낼 수도, 끝나지도 않을 역사이며 인류사에 있어 다시는 반복돼선 안된다는 점을 각인시켜주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은 100년 전 3.1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그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동시에 당시 화성지역의 3.1운동이 일제에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 중에서도 화성지역 3.1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격렬하고 조직적·공세적으로 전개됐다. 일제의 행정기구인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 우편국, 일본인 가옥들이 파괴되고 일본인 순사 2명이 처단됐다. 대부분 지역의 3.1만세운동이 평화적 시위였던 반면 화성지역 만세운동은 무력항쟁 성격을 띠었다. 3.1운동 당시 전국의 면사무소 19곳, 경찰관주재소 16곳이 완전히 파괴됐는데, 화성에서만 면사무소 2곳, 경찰관주재소 1곳이 파괴됐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을 찾은 화성 도이초교 학생들이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 화성시 제공


가장 먼저 만세시위가 벌어진 곳은 송산면 사강리. 3월 28일 사강 장날, 100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순사부장 '노구찌 고조'가 쏜 총에 시위 주도자 홍면옥이 부상을 입자 시위대가 노구찌를 쫓아가 처단했다. 사흘 뒤인 3월 31일 향남면 발안리에서도 장날 1000여명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인 가옥 소학교를 투석·방화하며 일본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이정근(호 탄운) 의사가 순국했다. 4월 3일 우정면·장안면의 연합시위가 벌어지며 만세운동은 절정을 이뤘다. 우정면 주곡리에서 출발한 주민들은 각 마을을 돌면서 시위대를 규합, 마지막에는 2000여명에 달했다. 시위대는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 화수경찰관주재소를 방화·전소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제 순사 '가와바다 도요타로'가 쏜 총에 이경백이 사망하고 시위대 다수가 부상을 입고 잡혀갔다. 하지만 분노한 시위대는 가와바다 순사를 끝까지 쫓아가 처단했다. 그만큼 우정·장안면 연합시위는 조직적·공세적으로 전개됐다. 이혜영 화성시 학예사는 "시위대가 주곡리에서 장안·석포·수촌리, 쌍봉산 정상을 거쳐 조안면 한각리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두 패로 나눠 화수주재소를 포위, 퇴로를 차단하고 방화·전소시켰는데 당시 이동거리가 31㎞에 달했다"며 "마을마다 미리 사람들을 조직해 합류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항쟁"이라고 설명했다.

◆일제의 학살, 민중들의 희생 = 위기감을 느낀 일제는 화성지역의 강렬하고 거센 3.1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기 전에 차단해야 한다고 판단, 특별검거반을 파견했다. 하지만 특별검거반은 시위 주동자 '검거'가 목적이 아니었다.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집을 불태우고 폭력과 고문, 살상을 일삼았다. 그 중에서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제암·고주리를 주목하다가 4월 15일 계획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아리타 도시오'를 비롯한 일본군은 제암리에 들어와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이들은 제암교회에 15세 이상 남성들을 몰아넣은 뒤 사격을 가하고 불을 질러 23명을 학살했다. 이어 이웃 마을 고주리로 넘어가 독립운동 지도자인 김흥렬 일가 6명을 난도질해 죽이고 불을 질렀다. 기획전 자료에 따르면 제암리 학살사건 생존자였던 노경태씨는 "아리타 중위가 나가자 뭐라고 세 번 날카로운 구령이 들려왔고 입구에 있던 병사들이 교회당 안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교회당 바닥에 앉아 있던 주민들은 뛰어오르고 쓰러지고 하는 아수라장이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고주리 학살사건 목격자 김시열씨는 "토막토막 난도질을 한 후 불을 놓아 시체를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어. 지금도 그 때 광경을 생각하면 현기증이 나"라고 증언했다.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은 과거 '제암교회 학살사건' 등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나 학살 주모자였던 아리타 도시오 중위에 대한 일본 군법회의 판결문이 발견되면서 사건의 실체가 명확해졌다. 일제는 당시 학살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지만 커티스·테일러·언더우드·스코필드 등 재한 공관·기자·선교사들에 의해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됐다. 해외여론이 점차 악화되자 학살 주범인 아리타 도시오 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 여론을 무마하려고 시도했다. '아리타 판결문'과 생존·목격자 증언 등에 따르면 일제는 독립운동 바람이 거세지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독립운동 근거지로 파악된 제암·고주리 전체를 3일 동안 불태우고 학살을 자행했다.

◆학살 주범은 '무죄', 잊혀져가는 독립운동가들 = 특히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의 실상을 알리는 것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해외에는 일본의 통치로 조선이 더 잘살게 됐고, 한국이 독립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알려져 있었다. 임시정부는 파리위원부를 설치하고 '자유한국(La Core′e Libre)' '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발간물(독립기념관, 안창호기념관 소재)을 통해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의 실상과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알리는데 힘썼다.

하지만 1919년 8월 21일 열린 재판에서 일제는 아리타의 학살행위는 인정하면서도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일본 헌병자료에는 제암·고주리에서만 사망자가 46명, 부상은 23명, 가옥 345채가 불타고 379명이 검거된 것으로 기록됐다. 일제가 보고한 자료임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규모는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당시 일본의 특별검거반은 송산 서신 우정 등 화성 전 지역에서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다. 때문에 화성에는 살아남은 독립운동가와 유족, 각종 사료도 거의 없다. 독립운동가 가운데 건국준비위원장을 맡았던 홍면옥 등은 광복과 분단과정에서 공산주의 노선을 추구, 지역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 주범은 처벌받지 않았고, 독립운동의 기억은 잊혀져가고 있는 셈이다. 이혜영 학예사는 "일제의 보복이 화성 전역에서 자행돼 죽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독립운동은 열심히 했지만 심문·재판기록이 없어 심사도 못받은 경우가 많다"며 "100주년을 맞아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진상규명과 독립유공자 발굴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인터뷰│서철모 화성시장] "독립운동 정신 되살려 평화도시로"

[신년기획] 100년 전 그날, 현장을 가다 연재기사

곽태영 기자 tykwak@naeil.com

곽태영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