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와 중국 가장 활발

미국·멕시코·쿠바서도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은 서울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됐다. 특히 한반도와 인접한 간도와 중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됐다. 최근에는 미국과 멕시코에 이어 쿠바에서도 지지대회가 열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곳에서 열린 지지대회는 국내와 달리 독립운동단체나 유학생, 한인단체 등이 주도했다.

당시 광주학생독립운동 소식은 주로 방학 때 귀향했던 학생들이 돌아와서 전달했다. 또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라디오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1940년대 학생들 등교 모습. 배낭을 메고 각반을 찬 학생들이 거수경례를 하며 교내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제공


광주학생독립운동사에 따르면 광주 소식을 접한 간도지역 학생들은 1930년 1월부터 3월까지 '광주학생에게 동정한다'는 격문을 뿌리고 시위를 전개했다.

길림 연길한인학우회가 1930년 1월 22일 처음으로 연설회를 열고 광주의 진상을 알렸다. 이후 용정 은진중학교에 이어 명신여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한번 불타오른 독립의 열망은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이어졌다. 2월 5일 용정지역 학생에 이어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에서도 '조선학생만세'라는 격문을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3월에는 조선 이주민이 많이 사는 간두 두도구에 이어 이도구, 삼도구 학생 500여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학생 50여명이 동조 시위를 하다가 잡혀가는 사건도 발생했다.

중국에서 일어난 시위는 간도와 달리 독립운동단체들이 주도했다.

중국 상해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이 1930년 1월 11일 법조계 민국로침례회당에 모여 조선학생운동을 적극 원조하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1300여명이 모인 이날 연설회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개회사를 했다고 광주학생독립운동사가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선 유학생이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유학생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쉽게 접했고, 국내 독립운동단체하고도 교류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성진회 소속 장재성이다.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29년 12월 24일 동경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인 학생 200여명을 모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연설을 했으나 경찰에 해산됐다.

오사카에서도 연설회를 준비했으나 아쉽게도 일제에 의해 무산됐다.

최근 김재기 전남대 교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미국과 멕시코, 쿠바에서도 광주학생독립운동 지지대회와 모금운동이 진행됐다. 이는 당시 각국에서 발행된 신문에서 확인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광주 소식은 3.1운동 11주년 기념식을 전후에 전해졌고 기념식이 자연스럽게 지지대회로 발전했다. 193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가 이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고 한다. 현지조사를 거쳐 쿠바에서도 100여명이 광주학생독립운동 등을 지지하고 특별후원금을 낸 것을 확인했다. 이밖에도 독일, 소련 등에서 발행된 신문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소개했다. 이처럼 세계 곳곳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김재기 전남대 교수는 "6년 전만 해도 중국과 일본에서만 지지대회가 열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면서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도 지지대회와 모금운동이 확인된 만큼 자료 발굴과 정리 작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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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국진 기자 kjb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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