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밀서 품고 파리로 향했던 여성독립운동가

인천시립예술단 창작뮤지컬로 되살아난 신여성

"우리나라의 독립과 정부수립의 절반은 여성의 참여와 실천으로 이루어졌기에 여성독립운동가, 그 중에서도 유관순 열사의 스승인 김란사 열사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인천시립예술단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공연으로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의 삶을 재조명한다. 인천시립예술단 소속 교향악단 합창단 무용단 극단이 함께 만든 창작뮤지컬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이다.

김란사는 유관순 열사의 스승이며 한국 최초의 여성유학생이다. 신문물이 들어오는 관문 인천항에서 신학문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단행한 한국 여성의 표상이 되는 인물이다.

시립예술단 합동공연 중 두꺼비떼에 습격당하는 고종황제(제작발표회 사진). 사진 인천시 제공


◆"고종 밀서 파리 강화회의에 전하라" = 김란사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결혼한 스물넷 나이에 이화학당을 찾아 1년간 공부했다. 이후 1896년 자비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에 앞서 서재필 유길준 김점동 등이 미국에 건너가 공부했다. 이들은 여러 상황에 의해 자의반타의반 유학길에 올랐다면 김란사는 달랐다. 순수하게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건너간 건 그가 처음이다. 당시 상황에서 여성이 자신의 의지로 미국 유학길을 떠났다는 것 자체로 그의 삶은 간단치 않다.

김란사는 평양에서 태어나 두살때부터 서울에서 살았고, 인천항의 통상업무를 담당하는 감리서 최고책임자인 하상기와 결혼했다. 그가 신문학에 눈뜬 건 남편 영향이 컸다. 그는 남편의 성을 따 하란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삶이 더 빛나는 이유는 유학 후 활동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한국의 여성을 위한 일에 바쳤다. 귀국 후 이화학당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선교사들과 학생들의 교량 역할을 했다. 유관순 열사도 김란사에게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김란사는 고종 황제의 통역도 맡았다. 엄 황귀비와도 가까이 지냈으며, 엄비가 '숙명'과 '진명' 여학교를 개교하는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고종의 밀지를 받아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을 시도했으나 고종 승하로 좌절되기도 했다. 김란사는 1919년 1월 독립지사들과 회합하기 위해 중국 베이징에 가 환영 만찬회에 참석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제 경찰이 보낸 자객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계양구 황어장터 3.1만세 재현행사. 사진 인천시 제공


◆세계를 만나는 창, 인천 = 인천시립예술단 창작극은 어둠에 가려져 그동안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자랑스러운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는 음악극이다. 예술단 소속 교향악단 합창단 무용단 극단 230명 전원이 모두 공연에 참여했다.

인천에서 이 공연을 준비한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강량원 총연출은 "그동안 대한민국의 시작점에 논란이 많았는데, 공립단체인 우리가 그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며 "특히 인천은 근대 문물이 도입되는 관문으로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던 곳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최원종 작가는 "주인공 김란사는 당시 세계를 만나는 창이었던 인천을 통해 접한 새로운 사상과 도전정신을 끌어안고 꺼진 등에 불을 밝힌 여성"이라며 "역사 속에 묻혀있던 영웅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기에 인천이 가장 적당한 장소"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중구 신포로에 '백범 김 구 역사거리' 조성

[신년기획] 100년 전 그날, 현장을 가다 연재기사

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김신일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