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격렬했던 대규모 만세운동 … 8명 숨지고 22명 중상

1919년 4월 3일. 음력으로는 3월 3일 삼짇날인 이날 오전 9시쯤 경남 마산부 진전면 양촌리 일암마을 앞 냇가에 대형 태극기가 세워졌다. 그러자 인근 진동·진전·진북 세 마을 주민 2000여명이 태극기 아래 모여들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미 3월 28일 고현 장터에서 500~600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던 경험이 있는 터라 몸은 재빨랐고, 마음은 결연했다.

허성무(앞줄 왼쪽 세번째) 경남 창원시장이 새해 1월 1일 팔의사창의탑을 찾아 신년참배를 하고 만세를 불렀다. 팔의사창의탑은 가장 격렬했던 3.1 만세운동 중 하나였던 창원 4.3삼진의거에서 희생된 8 인 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탑이다. 사진 창원시 제공


시간이 지나면서 기세가 오른 시위대는 일제의 거점 기관과 일본인이 모여 사는 마을 진동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지나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불어났고 절정인 오후 2시쯤에는 8000여명까지 모였다. 당시 마산부 전체 인구가 1만2000여명, 창원군 거주민이 1만1500여명 정도였다. 진동에 사는 주민은 채 2000명이 안됐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해 모여든 시위대가 8000명이었으니 집집마다 나서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위대는 힘에 힘을 보태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시위대가 도착한 곳은 진동으로 가는 길목 사동교. 다리 건너에는 일제 헌병들이 총칼을 겨누고 시위대를 막아섰다. 하지만 시위대 선두는 멈출 생각도 물러설 생각도 없이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렸고, 시위를 주도하던 김수동이 쓰러졌다. 김수동이 쓰러지자 옆에 있던 변갑섭이 김수동이 들고 있던 태극기를 받아들고 일제 헌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변갑섭도 일제 헌병의 군도에 양팔을 잃고 사동교 위에서 최후를 맞았다.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시위대는 분노했고, 일제 헌병을 향해 거칠게 나아갔다. 겁을 집어먹은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탄을 쏟아 부었다.

◆"나아감은 있으나 물러섬은 없다" = 100년 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나 한반도 남단 경남 창원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이다. 진동·진전·진북 세 마을 이름을 따 '삼진의거'라 부른다. 당시 격문에는 "가로되 우리 동포는 나아감이 있으나 물러섬은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삼진의거는 당시 가장 격렬했던 만세운동 중 하나였다. 규모에서도 대단한 위세를 과시했으며, 그만큼 피해도 컸다. 이 의거에서 시위대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름이 기록된 부상자만 22명이나 됐고, 이름 없는 수많은 부상자가 생겼다. 오후 3시쯤 일제의 무력진압에 시위대는 해산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가 옥고를 치렀다.

창원시는 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교수와 함께 4.3삼진의거의 정신과 석당 변상태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물을 제작했다. 배우 안성기가 내레이터로 참여했다. 영상은 시 홈페이지(http://vod.changwon.go.kr)에서 볼 수 있다. 사진 창원시 제공


삼진의거의 특징 중 하나는 철저히 준비된 항일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의거를 주도한 중심 인물들은 사람을 모으는 일이며 태극기와 격문을 만드는 일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당시 3.1운동이 단순 시위가 아니라 독립을 염원하는 조직적 저항운동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 의거인 셈이다. 그래서 의거를 준비하던 장소 '성구사'도 4.3 삼진의거의 발상지로 역사에 기록됐다.

삼진의거 참가자들은 일제가 지정한 병원에서 친료받는 것조차 거부했다. 조선인 의사가 운영하던 마산의 삼성병원과 호주 선교부가 운영하던 진주 배돈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삼성병원은 부상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줬고, 배돈병원 치료비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모두 충당했다. 당시 진북·진동면장들이 주민들에게 보낸 통지문은 당시 지역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이번 부상자들은 모두가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희생된 자들이므로 이들의 치료비는 우리가 갹출해야 한다." 이 통지문을 받은 주민들이 스스로 모금에 참여했고 성금은 치료비를 내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삼진의거의 또 다른 특징은 비폭력 시위를 펼치다 일제의 총칼에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격렬한 투쟁으로 전환됐고, 이후 폭력 만세시위로 발전하는 분기점이 됐다는 점이다. 한 지역이 아닌 여러 지역이 연합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점도 특징이다.

허성무 경남 창원시장은 "창원은 일제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한 역사를 안고 있으며, 그 정신이 1960년 3월 15일 자유·민주·정의를 외쳤던 3.15 의거로 이어졌다"며 "자랑스러운 역사를 창원 시민들의 자존감을 세우는 토대로 삼겠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거센 열망과 저항의 도시 '창원'

[신년기획] 100년 전 그날, 현장을 가다 연재기사

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김신일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