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피시설 갈등 풀어가며 결속력 다져

지역 문화자산 활용해 새 먹거리 창출

지난해 12월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 통과로 지방자치가 한 단계 성장할 것이란 기대가 높다. 무엇보다 지방자치의 주인인 '주민참여'가 강화된다는 점이 눈에 띈다. 김순은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위원장은 "그동안 지방자치 주체는 주민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에 머물렀다는 게 아쉬운 점"이라며 "전부개정안의 핵심은 지역주민 중심 지방자치로의 변화"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실제 자치를 체험할 수 있는 영역인 읍·면·동의 주민자치회 관련조항은 법안에서 빠졌다. 여전히 지방자치의 주인은 주민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주민자치회는 이미 전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게다가 동장을 주민추천제로 뽑고 주민총회를 열어 마을 일을 결정하거나 청소년과 청년들이 지자체 정책수립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내일신문은 지역별 주민자치의 모범사례를 발굴, 소개한다. <편집자주>

경기 고양시 고양동 주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12년째 마을축제를 열고 있다. 사진은 2019년 축제 때 진행한 영조행차행렬 모습이다. 이 행사에 주민 350여명이 참여했다. 사진 고양동주민자치회 제공


고양동은 경기 고양시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와 농촌이 어우러진 마을이다. 고양시에서 얼마 남지 않은 미개발 지역이면서 이른바 주민기피시설이 밀집해 있다. 대표적인 시설이 벽제화장장과 서울시립승화원이다. 접경지역이어서 군부대도 무려 18개나 들어서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기피시설이 잇따라 고양동에 자리잡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

◆지역갈등 해결하면서 결속력 다져 = 참다못한 주민들이 뭉치기 시작한 건 4년 전이다. 당시 레미콘공장으로 업종을 변경하려는 한 업체와 소송전을 벌인 끝에 업종변경을 막아냈다. 당시 주민들은 주민자치위원회를 중심으로 직능·자생단체들이 힘을 모아 '주민대책위'를 구성했다.

주민들은 동물 화장장을 건립하려는 업체와도 싸움을 벌였다. 2016년 시작된 싸움인데, 레미콘공장 업종변경 업체와 싸움에서 이긴 주민들은 이번 싸움에서도 엄청난 단결력을 보였고, 결국 동물화장장 건립을 막았다. 2018년에는 동물 건조장 조성 시도도 있었지만 이 역시 들어서지 못했다. 동물 건조장은 반려동물 장례시설의 일종이다. 지난해 수목장림 조성 시도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주민들은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벌였고, 고양시도 불허처분을 내리면서 일단락됐다. 지용원 고양동 주민자치회장은 "일각에서는 님비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주민들 입장에서는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라며 "둑이 무너지면 고양동은 기피시설 천국이 될 게 뻔한 상황에서 이를 반대하고 막아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일방적으로 중단한 버스노선을 되살린 일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이뤄낸 일이다. 서울시는 703번 버스노선을 폐쇄하려 했지만 주민들은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시에 항의해 결국 노선을 유지하도록 했다.

도서관 건립 과정에서도 주민들의 갈등조정 능력이 발휘됐다. 고양시가 이 지역에 도서관을 지으려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의견충돌이 있었는데, 주민자치위원회가 중재에 나서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다른 지역 도서관 운영실태를 조사하고 주민 의견을 수렴해 고양시에 전달했다. 주민자치위원회가 주도해 주민설명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 결국 양측의 의견은 좁혀졌고, 도서관 건립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고양 적장자 자부심으로 연 마을축제 = 고양동은 고양의 적장자라는 자존감을 갖고 있다. 고양(高陽) 한자를 순우리말로 풀어쓴 이름이 '높빛'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스스로 마을이름을 '높빛'으로 부르곤 한다. 이 이름을 붙여 진행하는 마을축제가 '높빛축제'다.

축제는 2012년부터 매년 9월 마지막주에 열었다. 대표 행사가 '다 같이 놀자, 동네한바퀴'다. 지역에 즐비한 문화재를 달구지를 타고 탐방하는 프로그램인데, 축제 참가자들에게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실제 이곳에는 조선 인조 때부터 고양군청이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벽제관이 있었고, 고양 향교도 이곳에 있다. 지난해에는 호랑이굴이라는 곳에서 신석기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세계에서 유일한 중남미문화원도 있다. 중남미 고위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곳이다. 주민들은 이 같은 지역 문화자산을 활용해 지역의 먹거리를 만드는 일을 구상 중이다.

영조행차행렬도 눈길을 끄는 행사다. 주민들은 2013년부터 벽제관지 활용방안을 모색해왔다. 그러다 영조대왕이 벽제관을 행궁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이를 계기로 2017년부터 영조의 행차행렬을 재연하는 행사를 시작했다. 2019년 행사 때는 주민 350여명이 참여했다. 학교 향교 고양문화원 군부대 등이 행사에 힘을 보탰다. 행사를 거듭하면서 행차행렬에 쓸 조선시대 복식 500벌을 만들었다.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지은 복식이어서 수억원의 가치가 있는 마을 자산이 됐다.

주민들은 지난해 코로나19 때문에 열지 못한 높빛축제를 올해는 다시 열기로 했다. 이미 12개 분야별 팀으로 구성된 조직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이 밖에도 주민자치위원회는 마을신문을 만들고 지역 농업인들이 생산한 농산물 판매 행사를 여는 등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주민자치회 전환, 공동체 활성화 = 고양동 주민자치위원회는 지난해 주민자치회로 변신했다. 오랜 기간 쌓아온 마을공동체의 힘을 이어가기 위한 결정이다. 영리사업이 가능하도록 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고, 사무국 설치도 준비 중이다. 홍길표 고양동장은 "주민자치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지역 갈등을 해결하고 지역경제 활성화의 길도 스스로 찾고 있다"며 "풀뿌리 주민자치의 모범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지방자치 넘어 주민자치 시대로" 연재기사]

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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