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각계에서 호응해 대대적 항일운동으로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 광주발 통학열차가 전남 나주역에 도착했다. 학생들이 개찰구로 향할 때 후쿠다(광주중 3년)를 비롯한 일본 학생들이 박기옥·이광춘(광주여고보 3년) 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센징'이라고 조롱했다.

박기옥의 사촌 박준채(광주고보 2년)가 나섰다.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라는 질책에 "센징놈이 뭐라고 까불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순간 "나(박준채)의 주먹은 그 자의 면상으로 날아가 작렬하였다". 다툼은 곧 학생들 패싸움으로 번졌다. 10월 31일과 11월 1일에도 학생들은 통학열차와 통근열차 광주역 일대에서 충돌하거나 집단적으로 대치, 광주시내 공기가 극도로 긴장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일제에 연행되고 있다. 사진 광주일고 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11월 3일 학생들 분노가 폭발했다. 일본 4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명치절이자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조선독립을 추구하고 식민지 교육체제에 반대하며 비밀결사조직(성진회)을 꾸린지 3년째 되는 날이었다. 광주고보 학생들이 명치절 기념식에서 일본 국가 제창과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교문을 나섰다가 일부가 광주중 학생들과 맞닥뜨렸다. 고보 학생이 칼에 찔리자 집단싸움으로 번졌는데 광주중은 유도선생을 비롯해 학생 수백명이 야구방망이와 검도로 무장하고 몰려나왔고 기숙사에 있던 광주고보 학생들과 광주농업고등학교 학생들도 합류했다.

목봉 삽 곡괭이 등으로 무장한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 '일본 제국주의 타도' '식민지교육 철폐'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누볐고 시민들이 합세, 한때 시위대가 3000여명까지 늘어났다. 일제는 곧 중등학교 휴교령을 내렸지만 12일 광주 장날 학생들은 다시 봉기했다.

광주에서 촉발된 학생운동 불길은 목포 나주 등 인근 지역으로 전파됐고 곧 전국으로 확산됐다. 서울 학생·사회운동단체는 광주에 특파원과 조사단을 보냈고 서울 시위와 전국 확대를 추진했다. 12월 4일 경성제일고보를 시작으로 13일까지 서울에서 시위와 동맹휴업투쟁이 진행됐다. 일제는 겨울방학을 단행했지만 학생들은 이듬해 1월 개학과 동시에 2차 시위를 준비했고 지방에서도 시위가 재개, 전국에서 3월까지 이어졌다.

1930년 3월 1일을 전후해 양상이 달라졌다. 평양에서 3000명, 충북 청주와 함북 경성에서도 1000여명이 운집할 정도로 도시지역 연합시위가 일반화됐다. 지방에서는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생까지 동참했다. 평양 기생학교 권번생 200여명, 영변 등산유치원생 수십여명이 시위대에 합류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학생들 투쟁은 북간도를 비롯해 상하이 베이징 등 중국과 일본 미주지역까지 확대됐다. 이후에도 각종 비밀결사 운동, 1940년대 강압적 징병·공출에 대한 저항, 1943년 5월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항일운동이 계속됐다.

* 자료 : 광주광역시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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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택 기자 durumi@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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