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일대 1500명 운집, 면사무소로 진격

주민역사가, 마을공동체사업으로 자료집 엮어

"민중이 주역이 되는 항일독립운동으로 진전"

"근일 삼천리강산 13도 중 2000만 동포가 모두 소동을 하는데 뚝도 청년들은 한마디 하지 않으니 … 2월 25일은 뚝도 우편안골 우물 앞으로 모여서 만세를 부르자. 시간은 하오 7시 30분…."

1919년 음력 2월 23일(양력 3월 24일)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서독도리(서뚝섬)에 3쪽짜리 유인물 '주의서(注意書)'가 뿌려진다. '조선건국 4252년'을 강조한 이 유인물을 비롯해 3월 9일부터 4월 5일까지 서독도리와 동독도리(동뚝섬) 일대에서 발견된 유인물과 격문 벽보만 총 6종. 만세시위와 동맹휴업, 일본인과 교제금지 등에 동참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인근 고양군 숭인면 왕십리와 한지면 하왕십리에서도 발견됐다. 지금은 모두 서울 성동구에 속하는 지역이다. 주동자들은 민족대표나 학생 등 지식인층이 아니라 지게꾼 마차꾼 등 노동자들이었다.

성동구립극단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뚝섬 만세운동을 재연한 창작뮤지컬을 선보였다. 사진 성동구 제공


◆한양에 땔감 공급, 노동자 운집 = 3.1운동 당시 뚝섬은 전형적인 도시 변두리지역이었다. 한양지역 땔감과 채소류를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취락 전편(1933)'에 따르면 한강 연안인 뚝섬 남쪽은 '강원도 삼림지대에서 물길로 운반한 땔감을 하역'하고 밭인 북쪽은 '채소를 재배, 땔감과 더불어 경성 시가지로 공급'했다. 땔감 공급은 196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최창준 성동역사문화연구회 대표는 "대부분 주민들이 하역작업이나 달구지 지게로 땔감을 한양으로 옮기는 일에 종사했다"며 "짐꾼 달구지꾼 우마차꾼 일용노동자 등 노동자들이 주체가 돼 뚝섬 만세운동을 주동했고 대거 참여했는데 지난 100년간 잊혀져왔다"고 설명했다.

잊혀진 뚝섬 만세운동을 새롭게 부각시킨 건 최 대표를 비롯한 역사문화연구회 회원들이다. 노조위원장 정당인 작가 등이 주민들과 함께 지역 역사를 공부하면서 1년에 서너차례 역사기행을 하는 모임인데 2013년 서울시 마을공동체사업으로 지역 근현대사를 담은 '뗏목이야기' 자료를 찾다 3.1운동 기록을 발견했다. 2016년 한차례 더 보완해 '뚝섬길 가득 채운 3월 함성 '뚝섬삼일운동' 자료집을 발간했다. 옛날 신문과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보훈처 공훈전자자료관 등을 일일이 확인하고 당시 기억을 간직한 주민들 구술 등 작업 끝에 결실을 봤다.

일제 경찰기록에 따르면 '3월 26일 오후 7시 30분 우물터에 모여 만세운동을 하자'는 유인물이 3월 23일 서독도리에 뿌려졌다. 유인물 제안처럼 3월 26일 저녁 9시쯤 동독도리 이문동과 야소교 교회 앞, 서독도리 밥집 앞 등 여러 곳에서 만세소리가 들렸고 각지에서 몰려든 주민 1500여명이 면사무소로 몰려갔다. 면서기를 구타하고 면장집으로 몰려가 돌을 던졌는가 하면 시위대 300여명은 가장 강력한 탄압기구였던 헌벙주재소를 포위하고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

헌병대측과 교섭을 하고 시위대가 해산하려던 즈음 경성에서 헌병 15명을 급파, 무차별 발포가 시작됐다. 1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을 당한 가운데 일제는 103명을 현장에서 체포했다. 총상을 입은 몇몇은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으로 몸을 숨기고 치료를 받았는데 경찰이 병원까지 수색, 결국 체포됐다.

연행자 가운데 시위 주동자로 체포돼 기소된 주민만 12명. 마차꾼 소달구지꾼 짐차꾼 단순노동자 등 노동자가 10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창준 대표는 "이날 일본 헌병 3명과 소방수 3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고양군 시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다"며 "뚝섬 만세시위는 민족대표와 학생층 중심에서 민중이 주역이 되는 항일독립운동으로의 진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아직도 전달하지 못한 대통령표창 = 주민들은 성수동 일대에서 당시의 흔적을 찾아내는 성과도 거뒀다. 최초 만세소리가 들렸던 이문동은 현재 한강에서 동네로 이어지는 성수제2육갑문 앞. 마을 입구를 알리는 문인 이문(里門)이 있었고 인근을 이뭇개 이문동이라고 불렀다는 주민 증언을 기록으로 남겼다. 문을 지탱했던 주춧돌로 추정되는 큰 돌 3개가 여전히 남아있다. 야소교(예수교) 교회는 현재 성수동교회로 추정된다. 1906년 설립됐는데 1917년 지금 위치에 신축해 자리잡았다. 당시 이름은 뚝도교회였다. 3.1운동 당시 지도로 추정하면 뚝도면사무소는 현재 성수동성당 자리에 있었고 헌병주재소 자리에는 지금 파출소가 자리잡고 있다.

3.26 뚝섬 만세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이들은 모두 12명인데 훈·포장(대통령표창)을 받은 이는 염명석·문창호 선생 2명뿐이다. 염명호 선생의 경우 2011년 딸이 아버지를 대신해 표창을 받았지만 문창호 선생은 후손을 찾지 못해 아직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민들은 동네에서 찾은 지역 역사를 공공에서 이어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옛 지도를 현재 지도나 건축물대장 등과 대조해 당시 흔적을 명확히 하고 사람들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주민들 구술을 확보해 독립운동가와 후손을 기리는 작업이다. 특히 성수동 일대는 곧 재개발이 예정돼있어 그간 찾아낸 흔적마저도 언제 묻힐지 모른다. 최장준 대표는 "한번더 보완하고 싶지만 민간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성동구에서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주민들과 공유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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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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