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보유고·해외 투자자산 규모 커져 유동성 위기 아니지만

실물 경제 악화 우려 커져 … "최소 2년간 침체 이어질 것"

"주요 교역대상 중국·일본 실물위기 전이되면 기업 줄도산"

고물가·고환율·고금리 상황이 이어지는 소위 '3고' 현상으로 한국 경제는 위기에 직면했다. 8월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면서 한국 경제의 위기설이 고개를 들고 있다. 제2의 IMF와 금융위기를 우려하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현재의 경제 상황을 진단하고 향후 한국 경제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필요성이 커졌다. 경제 위기는 한계기업과 저소득층 등 가장 취약한 부문이 우선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고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기다. 정부와 기업은 장기 불황에 대비하기 위한 구조 개혁을 중장기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편집자주>

지난 6일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내년도 세계 경제성장률 예측치를 기존 2.9%에서 하향 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10일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열린 IMF-세계은행 연차총회 첫날 대담에서는 내년 상당수 국가의 마이너스 성장 등 경기침체를 언급했다. 사진은 이날 워싱턴 DC IMF본부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들과의 타운홀 토론에 참여한 게오르기에바 총재. 연합·AFP


미국이 고물가를 잡기 위해 빠른 속도로 금리인상을 하면서 한미 금리 역전에 따른 환율 상승과 그로 인해 무역적자가 확대되고 국내 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무역적자 확대에 따른 경상수지 적자와 물가상승 압력은 다시 환율을 상승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금리인상은 수요를 위축시켜 물가를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지만 경기 침체로 연결된다.

11일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내년 상반기 전 세계 경제는 침체에 빠질 것이고 과거와 같은 V자형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며 "정부가 통화·재정 정책을 적극적으로 쓰기 어렵기 때문에 심각한 경기침체가 장기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외환·금융위기와 어떻게 다른가 = 환율이 한 때 1450원대에 육박하면서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는 공포로 시장의 불안이 커졌다. 하지만 외환·금융위기가 발생했던 당시는 유동성 부족으로 인한 위기였다는 점에서 지금과 상황이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현재 상황이 어려운 것은 맞지만 과거와는 다르다"며 "이번 달러화 강세는 글로벌한 현상으로, 우리나라는 외환보유액도 많고 올해 누적으로 보면 경상수지가 아직은 흑자인 상황이라서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점은 공감하지만 외환위기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상인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는 "외환위기 당시는 단기부채가 많았고 외환보유고가 1994년부터 단기부채를 충당할 수 없을 만큼 적었다"며 "단기부채는 많고 은행들은 장기대출을 해주다보니 미스매치가 발생해서 외환위기가 촉발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건전성 지표를 비교해도 차이가 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국내 외환보유액은 332억달러였고 1997년 204억달러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에는 10배 수준인 2622억달러, 2008년에는 2012억달러로 늘었다. 올해 8월 기준 외환보유액은 4364억3000만달러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보다 2배 가량 증가했다. 9월 4167억7000만달러로 다소 줄었지만 지표상 작은 규모는 아니다.

대외채권에서 대외채무를 뺀 순대외채권은 1996년과 1997년 각각 -464억달러, -680억달러였고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323억달러였지만 올해 2분기 기준 3861억4000만달러로 크게 늘었다.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바뀐 것이다.

외환위기의 단초가 된 단기외채는 1996년 758억달러에서 올해 2분기 1839억달러로 두 배 이상 증가했지만, 대외금융부채를 제외한 순대외자산은 -703억달러에서 7441억달러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증가했다.


다만 외환·금융위기와 같은 급작스런 충격이 닥칠 가능성은 낮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금융감독원 부원장을 지낸 최성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2008년과 같은 해외발 위기상황은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며 "최근 감세계획으로 영국이 문제가 됐지만, 금리를 계속 올리면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 재정이 국채금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시장신뢰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홍콩의 경우 경제는 중국에 속해 있는데, 환율은 달러화에 페깅(고정 환율)돼 있어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지속 가능한지 의심이 간다"며 "일본은 이자부담 및 경기하락 우려로 금리를 못 올리고 있는데, 일본의 과도한 국가부채의 문제가 결국은 드러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우려했다.

◆외환위기·금융위기 당시에도 경상수지 적자 = 8월 무역수지가 큰 폭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8월 경상수지 적자(30억5000만달러)가 발생한 상황은 위험한 신호로 볼 수 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당시에 모두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했다. 1996년과 1997년은 각각 231억달러와 8억2000만달러, 2008년은 64억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급격한 위기가 오지는 않겠지만 경기 침체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영익 교수는 "최소한 2년 정도는 침체가 이어질 것이고 2025년부터는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석원 SK증권 지식서비스 부문장은 "오랜 기간 저성장 기조가 지속될 것"이라며 "코로나 이후 일시적으로 나빠졌던 것을 부양시켜 잠깐 경제가 좋아졌다고 보였지만 만성적인 저성장의 연속이고 여기에 단기적으로는 미국 금리인상으로 인한 경기침체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최성일 연구위원은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에는 환율상승이 수출 증대를 통해 경기 진작에 도움이 됐지만 지금은 중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회복되지 않고 외국발 고물가와 고금리의 압박이 지속되면서 빠른 회복은 어려워 보인다"며 "주택시장을 기준으로 보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08~2013년의 장기 하락세가 재연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발 금융 불안에 중국발 실물 위기 겹치나 = 최근 유가가 다시 상승하면서 물가상승을 가속화시킬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계속될 수밖에 없고 한국은행 역시 금리인상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중국의 첨단 반도체 생산을 가로막는 반도체 장비 수출 제한 조치를 실시하는 등 미·중 분쟁이 격화되는 것도 시장 불안을 키우는 요인이다. 중국의 경기 침제가 국내 실물 경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

금감원은 최근 내부보고서인 '중국 경제 잠재리스크 및 대응방향'에서 중국 경제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보고서는 "중국 부동산시장 문제는 개발기업 유동성 이슈에서 현재 부동산 심리 악화 문제로까지 전이되는 양상"이라며 "개발사 디폴트가 확대될 경우 부동산시장 심리 추가 악화 및 은행 부실로 전이될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또 부동산시장 침체로 토지사용권 매각수익이 감소하는 등 정부 재정이 악화되고 있어서 정부 주도 인프라 투자 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또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봉쇄를 강화하면서 공급망 악화가 다시 발생하고 내수가 위축되고 있다. 2020년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17개월 연속 상승세를 기록한 대중 수출이 6월 이후 하락 전환했으며 점차 하락폭이 커지고 있다.

보고서는 "중국 성장률 하락시 우리나라도 성장률 추가 하향이 불기피하다"며 "중국 성장률 하락에 따른 내수수요 위축 등으로 대중 수출의존도가 높은 국내 산업에도 부정적 영향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특히 배터리와 반도체, 태양광 등 주요 첨단산업에 사용된 소재의 중국 수입 의존도가 높아서 중국 공급망 위축은 국내 산업에 치명적일 수 있다.

전기차 배터리 주요 소재인 전구체와 리튬, 흑연의 경우 올해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비중이 약 80~90%로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반도체 핵심 소재인 불화수소와 네온의 경우 수입 비중이 약 70~80%로 과거 3년간 일본 수출규제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영향으로 중국 의존도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

IBK경제연구소는 중국 경제성장률이 1%p 하락시 한국 경제성장률은 0.18%p 하락한다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중국과 일본이 금리를 올리지 못하고 버티고 있지만 실물위기로 넘어갈 경우 우리한테 전이될 수 있고, 주요 교역 대상국이어서 국내 기업들이 줄도산할 수 있다"며 "외환위기, 금융위기 때와 달리 중국과 일본 경제가 굉장히 취약해졌다"고 말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중국 위기 현실화시 위안화 가치 폭락으로 대변되는 금융시장 불안이 현실화되면서 원화 불안 등 국내 트리플 약세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며 "대중 수출 급감은 국내 기업에 큰 악영향과 자금경색을 유발할 수 있고 부동산 위기도 가시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 불안은 국내 경제에 가장 큰 위험"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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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창간 29주년 기획] 위기의 대한민국, 기로에 서다" 연재기사]

이경기 김영숙 백만호 박소원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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