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우(아들) : 이번에 본 영화는 전쟁 영화예요. 두 영화 다 극한의 상황들을 보여주는데, 특히 동상에 걸린 발가락들을 자르는 장면은 끔찍했어요.
고병수(아버지) : 전쟁은 특히 외상이 많지. 전쟁은 외상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감염병을 낳고, 그 외 동상이나 다른 질병들을 수없이 만들어낸단다. 두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해 보자.


자신의 발가락을 잘라내야 하는 동상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고 온 유럽이 독일의 군홧발에 짓밟힐 때, 영국은 여러 나라의 저항군 세력들을 모아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독일은 스웨덴의 철광석을 운송하기 위해 노르웨이의 북해에 위치한 항구들이 필요해서 노르웨이를 점령한 상태이다. 1943년, 노르웨이 출신들로 이루어진 부대원 12명은 독일군의 주요 거점을 파괴하려는 작전을 부여받고 노르웨이로 상륙을 시도하게 된다. 배가 미처 육지에 닿기도 전에 독일군 함정에 발각되어 11명은 잡혀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처형당하지만 혼자 살아남은 12번째 군인, 얀(토마스 굴레스타드)의 탈출기를 영화 ‘12번째 솔저(12th Man, 2017)’에서 우리는 특별한 질병을 보게 된다.

영화는 주인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영하 20도가 넘는 날씨와 얼어붙은 바다와 눈 덮인 산을 맨발로 걷고, 4㎞나 되는 바다를 헤엄쳐야 하는 등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극한 상황은 모두 담는 듯하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외딴 오두막에 숨겨진 얀은 잡히면 죽는다는 공포감으로 매일 밤 악몽을 꾸었고, 심한 동상을 입은 발가락들은 괴사되기에 이른다. 결국 자기 손으로 괴사되어 검게 죽어버린 발가락들을 잘라내야 했다. 탈출하는 과정에서 얼어붙은 바다를 헤엄쳐야 했던 것, 눈사태를 만나는 것이나 눈 속에 며칠이고 묻혀야만 했던 상황들이 있었지만, 영화에서 가장 처절하게 보였던 부분이 바로 자기 발가락을 뜯어내어 자르는 장면일 것이다.

우리 몸은 추워지면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신체의 끝부분인 귀, 손가락, 발가락들이 혈관을 수축시켜 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동상에 걸린 부위가 감각이 없어지는데, 빨리 따뜻하게 해주어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동상에 걸리고도 치료받지 못하고 추위에 장시간 노출하게 되면 결국 혈액을 공급받지 못해서 괴사, 즉 썩어버린다. 심한 경우에는 점점 더 괴사 부위가 넓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절단해야 한다. 영화에서 동상에 걸린 발가락들을 스스로 잘라내는 장면은 상당히 충격으로 다가온다.

잘려진 발가락으로 제대로 걷기도 힘들면서도 중립국이던 스웨덴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 속에서 급기야는 눈사태까지 만나서 피투성이가 되어 몸은 만신창이가 된 얀. 그를 돕는 노르웨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얀, 당신이 살아있다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독일인들이 당신을 찾지 못하는 건 우리 노르웨이인들에게는 자긍심이 되고 있어요.”

오두막에 숨겨준 사람들, 썰매를 만들어서 거동이 힘든 얀을 옮기던 사람들, 독일군의 위협에도 목숨 걸고 국경을 넘게 만든 사람들..... 그들을 만나면서 얀에게는 살아서 탈출해야만 하는 이유가 점점 강해져만 갔다. 탈주 63일째, 결국 얀은 스웨덴으로 탈출하게 되고, 안전하게 영국으로 돌아가 훈련 교관이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노르웨이 영화로 대자연과 설경을 배경으로 하고 오로라도 보여주면서 아름다운 장면들을 연출하고자 애쓴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아름답게만 봐야 할 배경 속에서 살기 위해 극한의 몸부림을 치는 얀의 투쟁을 담으며 역설의 미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 같다. 동상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북극 탐험대의 이야기를 다룬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Against the ice, 2022)’라는 영화에서도 잠시 볼 수 있다.

참호전에서 유래한 질병

동상과 비슷한 것으로 참호족이라는 것이 있다. 영어로는 ‘트렌치 풋(Trench foot)’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참호(Trench) 속에 오래 있다 보니 발생해서 만들어진 질병 이름이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기간 중에 이 병이 많이 생겨서 프랑스의 군의관 도미니크 장 라레(Dominique-Jean Larrey, 1766~1842)가 1812년 처음 이 병의 원인과 치료 등을 기술하였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라레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효율적으로 운송하는 방법을 고안하다가 마차를 개조한 구급차를 만들어 전장에 투입해서 많은 병사들을 살렸다. 훗날 구급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의사이다. 이후 1차 세계대전에서 참호전(Trench warfare)이 주로 벌어졌고, 여기에서 많이 발생하다 보니 이름도 참호족이 되었다. 참호는 또 훗날 멋쟁이들의 대명사가 된 트렌치 코트의 기원이기도 하다. 비도 막아주면서도 따뜻한 안감을 댄 긴 외투는 참호에서 입기 좋은 옷이 되어 당시 장교들의 공식 군복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민간에서 입는 트렌치 코트에는 계급장을 부착하던 견장, 수류탄이나 탄창을 걸 수 있는 허리의 디자인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동상과 참호족은 증상이나 위험성이 비슷하기 때문에 혼동될 수 있다. 동상(Frostbite)은 아주 차가운 곳에 있으면서 신체의 말단인 귀나 손, 발이 손상되는 반면에 참호족은 15℃ 안팎의 다소 따뜻한 온도에서도 생길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게다가 참호 속 군인들은 며칠이고 군화를 신은 채로 적과 대치하느라 발이 오래도록 습하게 군화 속에 갇혀있어서 발에만 주로 발생하게 된다. 환기가 잘되고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해주면 원상회복되지만, 방치하고 오래 두게 되면 세균 감염으로 ‘괴저(Gangrene)’가 생기면서 패혈증으로 사망하기도 한다. 동상은 인체가 방어작용으로 자신의 일부를 없애는 자연스런 작용이라면 참호족은 감염병이다.

상륙작전이나 장거리포, 폭격기 등을 이용한 현대전에서는 참호전이 유용하지 않다. 어느 지역을 사수하면서 총과 대포로만 전쟁을 치르던 1900년대 초의 전투에서만 긴요하게 이용했었다. 참호전을 실감나게 다룬 ‘저니스 엔드(Journey's end)’라는 영화가 있다. 2017에 제작된 영화로 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8년 프랑스 북부에 있는 영국군 부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상황을 담았다. 이 부대는 독일군과 1년 넘게 전투를 벌이고 있지만, 참호 속에서 단 1m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참호에서 조금 벗어나면 사람이 도저히 통과하기 힘든 철조망이 있고, 그것을 통과한다 해도 적의 기관총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막 임관을 해서 임시로 6일간 그 부대에 배속받은 제임스 롤리(에이사 버터필드) 장교와 어린 시절 잘 알고 지내던 스탠호프(샘 클래플린) 대위를 중심으로 병사들이 겪는 전장에서의 심리들을 여러 표정과 상황들로 세심하게 보여줌으로써 전쟁 영화로서는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영화는 참호전의 여러 모습들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영화에서 병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담배를 태우는데, 이것은 상황이 지루하고 담배 맛이 좋아서가 아니라 참호 안에 시체를 방치하다 보니 썩어가는 시체 냄새를 가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쥐나 그것들을 수십 마리 잡아서 매달아 놓은 장면들은 실제 그 당시 참호 안의 모습이다. 그리고 영화는 전쟁의 불합리성을 우회하면서 보여주는데, 목숨을 걸고 후추를 가져오게 하는 장교나 아무런 대책 없이 적진으로 가라는 군 수뇌부들. 의미 없는 전투에서 희생당하는 병사들과 그들을 책임져야 하는 장교들. 술로 매일 불안을 달래던 스탠호프 대위는 말한다.

“총이라도 맞았으면 어떨까? 그랬다면 더는 이 지옥을 견딜 필요가 없어지겠지.....”

독일군이 총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정보에 동터오는 새벽, 참호에서 전투 준비를 하는 병사들의 눈빛에서는 불안과 절망이 뒤섞여 있고, 호흡은 가빠지면서 모두들 이대로 주저앉을 것 같다. 저니스 엔드(Journey’s end)는 우리 말로 ‘여정의 끝’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감독은 그 여정의 끝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 6일간 의무 파견된 것이 끝나는 게 여정의 끝일까? 아니면 총탄에 쓰러져 더는 괴롭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는 걸까?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는 것일까?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없어진 적이 있기라도 한가?

전쟁의 역사에서 달라지는 외상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적이 없다. 칼과 창으로 전투를 벌였던 시대에는 일대일의 싸움이었고 자상(刺傷, Stab wound)이 대부분이었다. 워낙 외상이 많았기 때문에 그러면서 발달한 게 외과학이다. 전투에서 칼에 찔리거나 팔과 다리가 잘리게 되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치료는 손상 부위를 잘라서 출혈이 멈추게 하고, 괴사 또는 괴저병이 생기는 것을 막는 것뿐이었다. 마취법이 없던 시대의 수술은 통증과 합병증을 만들어내는 길이었다. 운 좋으면 살아서 장애인이 되는 것이고, 대부분은 수술이 잘 되더라도 감염으로 죽었다. 전장의학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 의사로 프랑스의 파레(Ambroise Paré, 1510~1560)를 들 수 있다. 그는 정식 의사가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이어온 이발 수술장이(Barber-surgeon)였지만, 전쟁터에서 32년간 군의 역할을 하며 실전 경험을 축적하였다. 150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손상 부위를 끓는 기름으로 지지는 것이 출혈을 멎게 하면서 치료를 하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파레는 기름 소작법으로 치료를 받는 병사들의 고통이 너무 심하고,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아서 다른 방법을 고안해낸다. 출혈이 있는 혈관을 잘 찾아서 묶었더니 피도 멈출 뿐 아니라 상처가 잘 아물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혈관 결찰법’이다. 병사들이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파레는 정식 의학교육을 받아서 닥터라는 지위를 얻었고, 후대들은 그를 근대 외과학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현대전의 시작인 제1차 세계대전은 손상의 수준과 상황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는데, 칼과 창 대신 기관총으로 대량 살상이 가능해진다. 총기와 포탄은 주 살상무기가 되어 적과 마주치지 않아도 심각한 부상이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었고, 독가스나 화염방사기도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을 거치며 인류의 전쟁은 대량살상 무기의 시대를 열었다. 이전의 진지를 구축하고 싸우던 참호전은 의미가 없게 된다. 항공모함과 폭격기, 탱크 등은 물론이고 인류 최초로 원자탄까지 등장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는 너무 많고, 독일의 마지막 목줄을 죄기 시작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를 차단하면서 동시에 이탈리아를 겨냥한 시칠리아 상륙작전은 당시 가질 수 있는 최첨단 무기들이 동원된다. 그만큼 대량살상이 가볍게 이루어졌다. 2차 대전 중에 전체 사망자는 6000만명~8500만명으로 추산하고, 그중 양측 군인들의 사망은 40% 정도를 차지하여 거의 3000만 명이 넘는다. 죽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부상자들은 얼마나 더 많았을까?

21세기 초에도 실제 군인들의 사망 원인으로는 감염병이 많았다. 칼, 총, 포탄에 의한 부상은 곧 감염으로 이어졌고, 상처 부위가 썩어가는 괴저병(Gangrene)뿐만 아니라 전염성 있는 폐렴 등도 주된 사망 원인이 됐다. 공식 기록으로 보면 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는 인플루엔자(독감)나 폐렴 등 급성 호흡기 질환으로 미군 병사 5만 명 가까이 사망했다고 한다. 1930년대부터 개발된 항생제는 이러한 감염병을 확연히 줄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예로 2차 세계대전(1939~1945)에서는 미군의 참전군인 수가 이전 세계대전의 두 배로 늘었는데도 같은 감염병으로 사망한 수가 공식 기록으로 1265명이라고 한다. 설파제의 대량생산으로 인한 결과였다.

["고병수 의사의 ‘영화 속 의학의 세계’" 연재기사]

고병수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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