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우(아들) : 이번에 본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Let me eat your pancreas [君の膵?をたべたい], 2017년)’ 영화는 제목만 보면 식인이나 엽기를 다루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도대체 왜 사람 몸의 일부를 먹고 싶다는 건지 영화를 보면서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고병수(아버지) : 그건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있었던 풍습이었어. 어쨌든 내용도, 구성도 잘 만들어진 영화더구나. 잔잔하면서도 감동을 주도록 연출도 뛰어났고..... 
동우 : 그리고 한 가지 불만은, 왜 영화에서는 항상 사랑하는 연인을 죽게 만들어서 안타깝게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병을 이겨내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면 좋을 텐데.....
아버지 : 비극적인 결말은 연극이나 영화에서 중요한 수단인가 봐. 관객들에게 안타까움을 주면서 여운이 오래 남도록 하는 것을 노리는 걸 거야.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다소 섬뜩한 영화 제목이다. 제목만 보자면 무슨 공포 영화인가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사실은 풋풋한 로맨스 영화이다. 자신이 다녔던 학교의 선생님이 된 주인공 시가 하루키(키타무라 타쿠미)가 도서관을 정리하면서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하루키는 고등학교 시절에 늘 혼자만 있던,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병원에서 야마우치 사쿠라(하마베 미나미)라는 여학생의 공책을 주워서 돌려주게 되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되고, 선생으로 지내는 현재와 과거의 상황이 오고 가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사쿠라는 자신의 투병 일기를 ‘공병문고(共病文庫)’라는 공책 속에 적어가고 있었는데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 투병 일기가 아니라 공병, 즉 함께 병을 알아간다는 뜻을 내포한 것 같다.

얼굴도 예쁘고 사교성이 좋아 학교에서 제일 인기 많은 소녀 사쿠라는 순진한 소년 하루키가 마음에 든다. 둘이 사귀면서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둘만의 여행도 다니게 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부분이나 뚜렷한 복선을 까는 것은 일본 소설이나 영화의 특징이다. 이 영화에서는 공병문고라는 투병 일기장, 도서를 정리하면서 사쿠라가 자주 하는 말 “책을 순서대로 정리하는 것보다 아무렇게나 두는 것도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지”하는 말은 사쿠라가 하루키에게 남기는 유서를 찾게 되는 복선이다.

영화는 일본에서 상당한 인기몰이를 했던 소설이 원작이고, 영화도 흥행에 성공해서 이듬해 만화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내가 죽으면 내 췌장을 네가 먹게 해줄게.”라고 말하면서 “누가 자신의 췌장을 먹으면 영혼이 그 사람 속에서 함께 살 수 있대.” 이렇게 사쿠라는 고백 아닌 고백을 하루키에게 한다.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아픈 부위에 해당하는 다른 동물의 장기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중요 장기를 먹으면 그 장기의 영혼이 들어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하게 된다는 오랜 믿음도 있어서 하루키에 대한 감정을 사쿠라는 내비쳤던 것이다.

췌장의 기능을 살짝 엿보면.....

췌장은 ‘이자’라고도 하는데, 영어로는 판크레아스(pancreas)라고 한다. 그리스어에서 ‘전체(pan)’라는 뜻과 ‘기름덩어리(creas)’라는 뜻이 합쳐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말이다. 손가락 두 개를 붙여놓은 너비에 길이는 15cm 정도이고, 위 뒤편에 있으며 뒷복벽 가까이에 붙어있다. 다른 장기들처럼 단단하지 않고 물렁물렁하다. 그래서 의과대학생들이 해부를 하다가 잘못 건들면 부서지기 쉬워서 그 부분을 다룰 때는 조심해야 한다.

췌장의 기능이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중요성이 밝혀진 1800년대 후반인데, 이전까지만 해도 의학의 세계에서는 위 뒤편에 숨어있는, 의미 없는 기름덩어리로만 봤다. 해부학과 조직학, 생리학이 발달하면서 췌장은 소화액을 만드는 중요한 장기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후 독일의 파울 랑게르한스(Paul Langerhans, 1847~1888)라는 의사가 1869년에 췌장에 섬처럼 분포되어 있는 조직 소견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고하였고, 그의 이름을 따서 ‘랑게르한스섬(Langerhans islets)’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사람에게서 혈당 조절을 하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한참 나중에야 알려지게 된다.

사람의 췌장에는 약 100~150만 개 정도의 그 섬들이 있다. 현미경으로 보일락말락한 섬들 속에는 알파(α), 베타(β), 감마(γ)라는 세포들이 있어서 우리 몸의 혈당을 조절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특히 베타 세포에서는 인슐린을 만들어서 혈액 속에 일정량의 포도당이 돌아다니도록 하는데, 인슐린 분비가 잘 안 될 때는 혈당이 높아지는 병인 ‘당뇨’가 되는 것이다.

췌장의 병을 대표하는 것은 술로 인해 생기는 췌장염과 영화 속 사쿠라가 앓는 것으로 보이는 췌장암이 있다. 위 뒤편에 있기 때문에 상복부가 아프면 흔히 위염인 줄로 착각하기 쉽다. 가장 심각한 병으로는 췌장암이 있는데, 이 또한 위가 아픈 것처럼 보여서 위염약만 먹다 보면 암이 더 진행하게 되어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지체되기 일쑤다.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퇴원하기를 반복하던 사쿠라는 영화 말미에 다른 문제로 어이없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오열하는 하루키. 훗날 다니던 학교에 선생으로 일하면서 둘이 만났던 도서관에서 사쿠라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이 영화에서처럼 병을 고치거나 어떤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동물의 장기를 취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전 세계에 퍼져있던 현상이다. 눈이 좋아진다며 생선의 눈알을 먹거나 머리가 맑아진다며 소의 골(뇌)을 먹기도 한다. 몸에 좋다며 곰쓸개(웅담)나 오소리, 소, 돼지의 쓸개를 생식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모두 의학 상식에 맞지 않다. 오히려 그 안에 있는 기생충에 감염될 위험이 더 크다.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감독의 ‘감각의 제국(愛のコリダ, 1976년)’에서 여주인공 아베 사다(마츠다 에이코)는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겠다는 생각으로 죽도록 좋아했던 남자의 성기를 잘라서 목에 걸고 다닌다. 변태스럽기는 하지만 이런 것도 췌장을 먹는 것처럼 민간의 관습으로 볼 수도 있겠다.

죽는 병으로 감동을 주는 영화

수천 년 전 고대 그리스 시대에 연극의 주요 주제는 비극이었다. 비극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진리를 맛볼 수 있는 단초이며, 끝이자 새로운 시작으로 보았기 때문에 관객들의 가슴을 어떻게 쥐어짤 것인가, 하는 기술은 희곡 작품에서 상당히 중요했다. 현대의 감독들이 그런 영향을 받은 것일까?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목록에는 비극적 삶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수 들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사랑하는 연인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수록 슬픔은 더 커진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와 같이 회자되는 일본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Crying Out Love, in the Center of the World [世界の中心で, 愛をさけぶ], 2004)는 백혈병에 걸려 죽은 친구의 이야기를 담았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리츠코(시바사키 코우)는 짐을 정리하다가 오래 전 입었던 옷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발견하고는 약혼자 마스모토 사쿠타로(오오사와 타카오 - 성인 역)에게 쪽지만 남기고 연락도 없이 사라진다.

그를 찾아 나선 사쿠타로는 고향집에 들러서 오래 전, 고등학교 시절에 사귀던 히로세 아키(나가사와 마사미)가 백혈병으로 죽기 전에 남긴 카세트 테이프를 듣게 된다. 옛일을 추억하면서 가슴 아파하는 사쿠타로. 그리고 사라진 채 여전히 무언가 찾아 헤매는 리츠코. 기상 예보에는 태풍이 몰려온다는 보도가 연신 들려오고.....

영화는 사쿠타로(모리야마 미라이 - 고등학생 역)의 고등학교 시절과 현재를 왔다갔다 하면서 보여준다. 리츠코는 자기가 결혼할 상대가 아키의 남자 친구 사쿠타로였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서 방황했던 것이다. 그 시절, 오래 전 우리처럼 밤중 음악 프로그램인 ‘미또 나이또 웨이브 프로그램(미드나잇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사연도 보내던 기억. 돌아가신 교장선생님과 그를 몰래 사랑했던 아마다이라 사진관의 시게 아저씨, 그 사진관에 놓여있는 사쿠타로와 아키의 사진, 17년 전 불었던 태풍처럼 지금 다시 불어오는 태풍..... 수많은 사연들이 태풍처럼 지나가고, 리츠코는 사쿠타로에게 테이프를 전해주며 흐느끼면서 말한다. “아키 언니의 테이프를 너무 늦게 전해줘서 너무 미안해.”

둘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는 언덕을 찾아간다. 여기는 아키가 늘 가고 싶었던 곳. 그곳에서 사쿠타로는 아키의 음성을 되새긴다.

“너 생일 11월 3일 맞지?
내 생일은 10월 28일이니까, 네가 세상에 태어난 후에 내가 없었던 적은 1초도 없었어.“
“멀리서 빵을 먹던 모습, 스쿠터를 타고 갈 때 안았던 너의 품, 이 모든 것이 소중해.”

백혈병은 사랑하는 이가 갑자기 죽게 되는 내용을 만들기 위해 오래 전부터 사용해왔던 단골 소재이다. 50대 이상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이탈리아 영화, ‘라스트 콘서트(The Last Concert, Stella [Dedicato A Una Stella], 1976)’도 백혈병 진단으로 3개월 정도 시한부 삶을 살아야 하는 스텔라(파멜라 빌로레시)와 슬럼프에 빠진 피아니스트 리차드(리차드 존스)의 사랑을 다루었다. 바닷가를 거닐 때나 둘이 행복하게 손을 잡고 걸을 때마다 나오는 삽입곡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음악 사이로 나지막히 고백하듯이 말하는 스텔라의 목소리..... “I love you Richard.”

리차드는 스텔라의 사랑과 격려로 재기하고, 그의 곡은 파리 무대에서 교향악단과 함께 협주하게 된다. ‘스텔라에게 바치는 곤체르토’가 넓은 공연장에서 연주될 때, 핼쑥하고 하얘진 얼굴로 커튼 뒤에 앉은 스텔라는 피아노를 치는 리차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군다.

영어로는 백혈병을 ‘Leukemia’라고 한다. 그리스어 ‘leukos(하얀)’와 ‘haima(피)’란 말이 합쳐진 이름으로, 잘못 증식한 백혈구 세포들이 많아져서 우리 몸을 망가뜨리는 혈액암이다. 이름 때문에 백혈구가 많아지니 피가 하얗게 되는 줄 알고 영화에서는 항상 이 병에 걸린 사람을 맡은 배역들을 창백하게 분장시켜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쥐어짜게 만드는 효과를 노린다.

["고병수 의사의 ‘영화 속 의학의 세계’" 연재기사]

고병수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