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금보장형 쏠림에서 투자형 상품 비중 높여 노후준비 '든든하게'

소비자보호 위한 적격투자상품 승인 … 전문적 자산관리 운용 요구

미국에는 '401K'라는 퇴직연금 제도 덕에 은퇴 후 풍요로운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일찌감치 디폴트옵션 제도를 도입한 미국, 영국, 호주 등 선진국에서는 퇴직연금 연평균 수익률이 8%대에 달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퇴직연금 수익률은 1~2% 수준이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손실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디폴트 옵션'이 시행된다. 우리도 퇴직연금으로 부자가 될 수 있을지 제도의 운용방법과 금융업계의 준비상황을 자세히 알아본다. <편집자 주>

오는 12일 국내 퇴직연금 시장에도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시행된다. 2005년 퇴직연금제도가 시작된 이후 가장 큰 변화다. 그동안 국내 퇴직연금은 가입자의 무관심이나 금융 전문성 부족 등 다양한 이유로 원금보장형 상품에 방치되면서 실질적인 노후소득 보장 기능을 상실한 채 규모만 커졌다.

디폴트옵션은 가입자가 직접 운용할 수 있는 퇴직연금이 운용 지시 없이 방치되고 있으면 사전에 가입자가 지정한 상품이나 포트폴리오에 따라 퇴직연금을 운용하도록 한 제도다. 방치됐던 자산을 적격 투자상품에 투자해 기대수익을 높이고, 근로자의 노후 자산을 든든하게 늘릴 수 있을지 기대된다. 다만 최근 급변하는 금융시장 상황으로 원금손실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가 확대되고 있다. 소비자 보호를 위한 적격투자상품 승인과 자본시장업계의 전문적 자산관리 운용능력이 요구된다.


◆원금보장형 86% 비중, 수익률 1.35% = 8일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295조6000억원으로 300조원에 육박한다. 상품 유형별로는 원리금보장형이 255조4000억원으로 전체의 86.4%를 차지했다. 실적배당형은 40조2000억원으로 13.6%로 집계됐다. 수익률은 원리금보장형이 1.35%에 그쳤고, 실적배당형은 6.42%로 나타났다. 수수료와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손실 수준이다.

제도 유형별 비중을 보면 근로자가 퇴직시 수령할 퇴직급여가 근무기간과 평균임금에 의해 사전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확정급여형(DB)은 171조5000억원으로 58%를 차지한다. 사용자가 부담금을 정기적으로 납입하고 운용 책임은 근로자에게 있으며 퇴직금 지급액은 운용 성과에 따라 달라지는 확정기여형(DC)은 77조6000억원(26.2%), 이직 및 퇴직시 수령한 퇴직급여와 가입자 개인이 추가 금액을 적립해 운용하는 개인형퇴직연금(IRP)는 46조5000억원(15.7%)다. DB형의 수익률은 1.52%로 낮았고, DC형·IRP특례 2.49%, 개인형IRP가 3.00%로 DC형과 개인형 IRP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DB형은 퇴직연금 운용 수익금과 무관하게 정해진 퇴직연금을 받는 것에 반해 DC형은 근로자 본인이 방치하지 않고 관심을 갖고 운용한다면 발생한 수익금도 퇴직금 수령 시 함께 받을 수 있다. 운용 수익과 손실에 따라 DB형보다 수령액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DC형은 매년 연봉 상승률이 적고 이직률이 커서 근속 기간이 짧은 근로자에게 유리한 퇴직연금제도다. 또 사용자와 금융회사 입장에서도 퇴직연금 DC형이 유리하다.

개인형퇴직연금 IRP는 근로자가 재직 중에도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금융회사의 IRP에 가입하거나 퇴직할 때 받은 퇴직금을 계속해서 적립 운용할 수 있다.

디폴트옵션은 DC형 IRP에 도입되는 제도로 근로자가 퇴직연금에 신규 가입했거나, 기존 상품의 만기가 도래했음에도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때 적용된다.

◆만기 후 운용 지시 없으면 6주 후 적용 = 4주간 운용 지시가 없는 경우 퇴직연금 사업자로부터 '2주 이내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해당 적립금이 디폴트옵션으로 운용된다'는 통지를 받게 되며 통지 후에도 2주 이내에 지시가 없을 경우 디폴트옵션으로 운용된다.

사전지정운영은 금융회사가 미리 만들어놓은 운용 상품들 중에서 근로자가 원하는 상품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먼저 퇴직연금사업자들은 어떤 유형의 상품을 운용할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고용노동부의 승인을 받는다. 승인받은 상품을 회사에 갖고 가 적합한 상품을 골라달라고 하면 회사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고 퇴직 연금에 반영한다. 근로자는 상품군 중 자기에게 제일 적합한 상품을 골라 지정할 수 있다. 이때 들어갈 수 있는 상품군에는 원리금보장상품과 타깃 데이트 펀드(TDF), 단기 채권형 펀드 MMF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디폴트옵션으로 적립금을 운용하고 있지 않은 근로자도 언제든지 운용할 수 있다. 반면 디폴트옵션으로 운용 하면서도 언제든지 원하는 다른 방법으로 운용 지시가 가능하다.

DC형 퇴직연금 가입자는 디폴트옵션이 적용되는 주요 대상이다. DC형은 기업이 매년 연봉의 12분의 1을 적립하면 근로자가 이를 직접 운용하는 구조다. 사용자와 근로자가 사전 합의한 소수의 디폴트옵션 상품군 가운데 포트폴리오는 투자 성향 등에 따라 근로자가 미리 선택할 수 있다. IRP는 근로자가 개별로 가입해 여유자금을 운용하는 상품이다. 그런 만큼 가입자가 자유롭게 디폴트옵션을 지정하면 된다.

디폴트옵션 상품의 투자한도 역시 100%로 늘어나면서 기존 펀드, 주식 등의 위험자산 편입 비중을 70%에 묶는 제한이 사라진다. 디폴트옵션 시행으로 원리금보장 상품군에서 위험자산 비중이 높은 포트폴리오(주식형펀드, 주식혼합형펀드, 공모ELS) 비중을 늘릴 수 있게 됐다.

김동엽 미래에셋 투자와 연금센터 본부장은 "퇴직연금 투자는 노후대비용 자금이므로 일반투자에 비해 안정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며 "디폴트옵션은 가입자들의 합리적인 투자 운용과 선택을 돕는 제도"라고 강조했다.

◆DC형 퇴직연금, 합리적 운용 중요 = 디폴트옵션은 가입자가 퇴직연금 운용을 방치하게 되는 심리적 원인에 초점을 뒀다.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퇴직연금이 기존의 퇴직금처럼 안정적으로 쌓이기 바라는 심리가 있다. 또 노후에 사용할 금액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인 투자성향을 가지게 된다. 이석훈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DC형 퇴직연금은 가입자들의 합리적인 투자 운용이 매우 중요하다"며 "하지만 "장기투자를 처음 해보는 일반인들은 퇴직연금 운용상품의 선택을 매우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장기투자로 적합한 운용상품들은 주식이나 채권, 펀드, 대체투자 등의 적절한 조합이다. 개인들이 운용상품들을 적절하게 선택하고 관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많은 DC형 가입자들은 그 중요성에 비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거나 운용상품을 선뜻 결정하기를 꺼린다.

다수의 행동경제학의 연구들은 많은 DC형 가입자들이 투자에 무관심하거나 여러 행태적 편의로 인해 투자를 합리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있음을 보고한 바 있다. 미국을 비롯한 해외 정책당국자들은 2000년대 들어와서 이런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고 이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디폴트옵션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많은 해외 퇴직연금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한 디폴트옵션제도는 퇴직연금 가입자의 운용수익과 노후 자금 마련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형증권사 한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국민 노후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만큼 미국에서 적격디폴트옵션 조항을 두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에서도 투자자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며 "효과적인 정보 제공이나 투자자 교육 등을 잘 마련하고, 퇴직연금사업자들은 디폴트옵션을 잘 구성하고 상품을 알기 쉽게 잘 설명해 가입자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퇴직연금으로 부자되기" 연재기사]

김영숙 기자 ky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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