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최자 없으니 지자체 역할 더 중요"

전문가들, 군중밀집 대응매뉴얼 요구

핼러윈데이를 맞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수십만명의 인파가 몰릴 것이라는 예측은 일찌감치 나왔다. 3년 만에 처음으로 마스크를 벗고 핼러윈축제를 즐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이태원 일대는 이미 몇 주 전부터 들썩였다. 하지만 정부도 지자체도 군중밀집 상황에 대한 대책이 전무했다. 서울 용산구에서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한 방역대책을 세운 것이 전부였다.

이태원 참사, 추모의 메시지 ㅣ 30일 오후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마련된 '핼러윈 인파' 압사 사고 희생자 추모 공간에 시민들이 헌화한 국화꽃과 추모 메시지가 놓여 있다. 서울 연합뉴스


31일 내일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재난안전 전문가들은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발생한 대규모 압사사고의 책임이 정부와 지자체에 있다고 지적했다. 대규모 군중이 밀집할 것이 예상됐는데도 이에 상응하는 안전대책을 마련하지 않아 사고를 방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송창영 광주대 교수는 "국가와 지자체는 재난을 예측하고 예방할 법적 책무가 있다"며 "이번 사고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도 서울시와 용산구가 예방 대책을 세우지 않아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실제 서울 용산구는 핼러윈 기간 이태원 일대에 10만명 이상의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따라 26일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 등 상인들과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유흥시설 및 음식점 방역수칙 등 지도점검 간담회'를 개최했다. 주된 내용은 생활방역 준수, 시설물 관리, 마약류 매매·알선 방지 등이었다.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경우에 대비해서는 영업장 앞 도로 위 테이블 등 시설물을 자율적으로 정비하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용산구는 다음날인 27일 부구청장 주재로 '핼러윈 대비 긴급 대책회의'도 열고, 27~29일 3일 동안 직원 150명을 동원해 비상근무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하루 근무자 50여명을 투입해 방역과 노점단속, 차량견인 등의 업무를 하도록 했다. 용산소방서도 지난 25일 '핼러윈 소방안전대책'을 세웠지만, 48명의 의용소방대원을 집중 배치해 순찰하는 수준의 대책이 고작이었다. 관계기관 어느 곳도 대규모 인파가 몰려 벌어질 수 있는 안전사고에 대한 대책은 세우지 않은 셈이다.

반면 지난 15~16일 이태원 일대에서 열린 '지구촌 축제'의 경우 안전관리와 질서유지를 위한 인력이 대거 투입됐다. 당시 이 행사는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가 주최하고 서울시·용산구가 후원하는 형태로 이뤄졌기 때문에, 용산구가 행정인력 1078명을 파견해 안전관리와 질서유지를 지원했다. 차량과 보행을 통제하고 대로는 차 없는 거리를 운영해 참가자들이 안전하게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축제에 다녀간 인원은 핼러윈 기간보다 6~7배 많은 100만명이었다.

◆현장 아수라장, 구조인력 접근 지연 = 이태원 핼러윈참사 당시 현장에 많은 인파가 몰리고 도로가 마비되면서 구조 인력 투입이 늦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30일 중대본과 소방 등에 따르면 전날 오후 10시 15분쯤 '용산구 이태원동 한 골목에 10명이 깔려있다'는 신고가 최초로 접수됐다. 소방은 신고 내용을 토대로 정확한 위치파악을 한 뒤 오후 10시 17분 관할 소방서에 출동 지령을 내렸다. 구급차가 현장 첫 도착 시간은 신고 시간보다 4분 뒤인 10시 19분이었다.

하지만 구조활동이 곧바로 이뤄지지 못했다. 전문가들이 보는 압사사고 구조 골든타임은 사고발생 후 4~5분이다. 하지만 사고 당시 이태원 일대가 인파로 가득 차 있어 구조대원이 희생자들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소방당국은 10시 43분 대응 1단계를 발령했고, 이어 11시 13분 대응 2단계로 상향했다. 또 11시 50분에는 대응 최고 단계인 3단계로 격상했다. 이때는 이미 최초 신고가 이뤄지고 1시간 30분이 지난 뒤였다. 이마저도 이태원역 인근 도로가 마비되면서 실제 현장 투입은 더 늦어졌고, 사고 규모에 비해 적은 인력이 동원돼 구조가 더뎌졌다.

◆"군중밀집 대응매뉴얼 마련해야" = 재난 전문가들이 이번 참사의 원인을 지자체의 안일한 대처에서 찾는 이유다. 류상일 동의대 소방방재행정학과 교수는 "대규모 군중이 밀집할 것을 예상했다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안전인력을 배치했어야 했다"며 "더욱이 주최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정부나 지자체가 더 신경 써 조치를 취하는 게 정상"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참사에 대한 정부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이 잇따른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이번 참사에 대해 "행사 주최가 없는 자연발생적인 군중밀집 상황이라 대응 주체가 불분명했다"고 분석했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예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수준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번 참사를 예측하기 어려운 불가항력적 사고로 치부한 셈이다. 류상일 교수는 "사람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안전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크다는 의미"라며 "행정안전부가 나서 군중밀집 상황에 대한 대응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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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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