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우(아들) : 영화 제목이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예요. 조울증을 앓는 주인공과 로맨스를 다룬 영화인데, 나름 감동이 컸어요. 주인공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은 것도 다소 있었지만.....
고병수(아버지) : 그럴 거야. 하지만 그 질환을 알고 나면 그가 왜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된단다.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여러 가지 정신질환들이 등장해. 조울증이라고 불리는 양극성 장애, 경계성 인격장애, 간헐적 폭발성 장애, 도박 중독 등이야.
고동우 : 의과대학생이지만 아직 정신의학 공부를 안 해서 구분들을 잘 못하겠어요.
고병수 : 너무 깊게 들어가면 어려우니까 영화를 보면서 살짝만 언급해 보자.


고등학교 역사 선생이었던 팻 솔라타노(브래들리 쿠퍼)는 어느 날, 동료 선생이 자기 부인과 외도하는 것을 목격하고 한순간 감정이 폭발해 폭력을 휘둘러서 정신 감정을 받게 된다. 단순하게 보면 있을 수 있는 감정 표현이었지만 정신의학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어 8개월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고, 문제를 일으키면 다시 입원하는 조건으로 퇴원한다. 입원실 벽에 붙여놓으며 긍정의 힘으로 삼은 ‘보다 높이(EXCELSIOR)’ 라는 문구처럼 부인 니키와 재결합할 희망을 갖는다. 하지만 병원을 나와 보니 직장에서는 쫓겨나 있고, 집에 있는 아이와 부인에게는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 상태. 그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는 팻에게 조울증이라고 말하고 꾸준히 약을 먹고 상담 받으러 올 것을 요구한다.

조울증과 경계성 인격장애의 만남

‘실버라이닝 플레이북(Silver Linings Playbook, 2012)’의 도입 부분이다. 이 영화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어려운 영화이다. 단순하게 보면 흔히 평가하듯 로맨틱 코미디로 보고,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면서 아름답게 사랑을 만들어나간 남녀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용을 조금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렇게 쉬운 영화만은 아니라 치밀하게 질병과 그 증상들, 그리고 치유 방법까지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내용들을 짚어나가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다.

부모의 집에서 얹혀살아야 하는 팻은 밤에 잠을 잘 안 자고, 새벽에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아버지(로버트 드 니로)와 큰 소리로 싸워서 동네 사람들을 다 깨워놓는다. 그리고 그는 약을 거부하고 운동으로 낫게 하겠다며 매일 아침 쓰레기 검정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달리기를 한다. 티파니와 대화할 때도 상대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고 내뱉는 행동, 티파니 부모를 만날 때도 깨끗한 복장이 아니라 비닐 옷을 입고 가는 것처럼 남을 고려하지 않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러한 것들은 전형적인 조울증 증상으로서 정신의학 용어로는 ‘양극성 장애(Bipolar disorders)’라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흥분되고 기분이 떠 있는 ‘조증’과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우울’ 상태가 번갈아 오는 것을 말하는데, 그 글자를 따서 조울증이라고 흔히 부른다.

친구의 소개로 처제인 티파니 맥스웰(제니퍼 로렌스)을 만나게 되는데 경찰관이었던 남편이 바로 얼마 전에 사고로 죽어서 그의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였다. 친구의 집에서 식사를 하다가 둘이 클로노핀(진정제), 트라조돈(항우울제)을 공통으로 복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의기투합하지만 팻은 눈치 없게도 ‘남편 토미는 왜 죽었어?’라고 대놓고 아픈 가슴을 후벼 판다. 외로움과 흥미 없는 일상을 지내던 티파니가 부모와 같이 살지만 다른 건물에 따로 산다고 하며 같이 자자고 할 때, 또 눈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자기는 결혼했고 너는 남편이 죽었으니 그럼 안 된다, 라고 상대방의 분위기나 감정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내지르는 펫. 그는 계속 헤어진 부인과 다시 결합할 거라는 생각에 꽂혀있기 때문이고, 자기가 무슨 실수를 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런 굴욕에도 티파니는 달리면서 동네를 도는 팻에게 관심을 보인다. 티파니를 부담스러워 하는 펫에게 담당 의사는 그와 친해지면 주변 친구들과도 친해지게 되고, 그러면 증세가 빨리 좋아진다는 말에 이번에는 펫이 일부러 티파니에게 접근을 해본다. 좋아서라기보다는 자기를 떠난 부인에게 편지를 전해주기를 바라는 목적이 컸고, 티파니는 그것을 수락하면서 함께 춤 경연에 참가하자고 거래를 한다. 어떤 것에 빠지면 열성을 다하는 팻은 춤 경연 준비에 몰두한다.

영화는 로맨스가 중요 줄기이지만,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깊은 유대관계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서 보여주는 작품이다. 펫 주변 면면을 살펴보면, 우선 티파니는 우울증과 불안정한 대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팻을 쫓아다니는 것은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의지하려는 성향을 보여주고, 자신은 충분히 보상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니던 직장의 남성들과의 문란한 성관계 등은 바로 ‘경계성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의 모습들이다. 미식축구광이면서 필라델피아 이글스의 팬이면서 모아 둔 돈을 모두 도박에 털어 넣거나 춤 경연에 5점을 넘느냐 마느냐로 돈을 건다든지 하는 팻의 아버지는 충돌조절장애의 하나인 ‘병적 도박(Pathological gambling)’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책상 위의 리모콘을 가지런히 놓는다든지 아들이 옆에 있어 줘야 경기에 이긴다면서 억지를 쓰는 장면은 그가 ‘강박장애(Obsessive-compulsive disorder)’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들은 모두 정신의학의 공식 용어로서, 영화에서는 이런 것들에 대한 증상들을 보여주면서 해소되는 과정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팻의 문제를 조울증 말고 하나 더 꺼낸다면 정식 의학용어로 ‘간헐적 폭발성 장애(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를 들 수 있다. 보통 ‘분노조절장애’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인과 바람난 동료 교사를 적당히 때리면 좋은데 거의 죽을 정도로 폭력을 가한 점, 미식축구를 보다가 상대 관중들과 싸운 점 등은 앞뒤 생각하지 않는, 이 질환의 증상들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이해와 지지 속에 해소되는 갈등

우수한 점수가 아닌데도 중간 점수인 5점을 받고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하는 둘의 모습과 박수를 치면서 응원을 하는 지인들. 비로소 팻을 인정해주는 아버지, 누구보다도 그를 북돋워준 어머니와 티파니, 이들의 지지는 팻의 정신질환 치료에 효과가 높은 것들이다. 춤 경연이 끝나면 과연 팻은 헤어진 부인과 티파니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이것은 팻이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인 것처럼 썼지만, 사실은 티파니에게 보내는 것임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 답이 나온다. 그의 편지 중에 나오는 구절인 “당신을 만나자마자 알았어요. 이 말을 하기까지 오래 걸려서 미안해요. 내가 깨닫지 못한 탓이예요.”라는 말에서 팻의 마음을 읽게 된다.
영화의 제목을 분석해 보자. 원작자는 ‘나쁜 상황에서도 좋은 일은 있기 마련이다(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라는 영어 속담을 인용한 것 같다. 아버지가 헤어진 부인 생각은 더이상 하지 말고 현실을 바라보라고 하자, “왜 그런 말을 하죠? ‘보다 높이’ 가야죠. 부정적인 생각은 태워 버리고 구름 뒤 햇살을 찾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팻. 구름의 가장자리로 번져 나오는 햇살이 바로 ‘실버 라이닝’이고, 어두운 현실 뒤에서 드러나는 희망이었다. ‘플레이북’은 미식축구나 운동 경기에서 사용하는 작전 수첩 같은 것이니, 이 영화 제목은 쉽게 표현하면 희망 만들기 작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병수 의사의 ‘영화 속 의학의 세계’" 연재기사]

고병수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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