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수(아버지) : 지난 번에 거꾸로 나이를 먹는 영화를 보면서 나이듦에 대한 얘기를 했잖아? 환상적인 내용이지만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됐지.
고동우(아들) : 맞아요. 저는 아직 어리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영화를 많이 생각하게 될 거 같아요.
고병수 : 이번에는 나이가 든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몇 편을 짧게 살펴보자.

결혼한 지는 오래됐고, 한 집에 같이 살면서도 각방을 쓰는 중년 부부 이야기는 주변에서 많이 듣는다. 나이가 들고 이 정도 오래 함께 살게 되면 ‘끌림’보다는 ‘정’으로 사는 거라고 사람들은 애써 합리화하거나 인정해버린다.

 ‘호프 스프링즈(Hope Springs, 2012)’ 영화의 아놀드(토미 리 존스)도 그런 생각을 가진 50대 후반의 남성이다. 결혼 31년차로서 아놀드는 나이가 들어 별로 흥미를 잃었지만, 케이(메릴 스트립)는 여전히 성생활을 즐기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열쇠를 꽂아야 문이 열리는 법. 부인의 유혹에도 남편은 냉담하다. 오늘은 같이 있고 싶어서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부인에게 “무슨 일 있어?” 퉁명스럽게 말을 하고, 케이는 “아니, 오늘 밤은 같이 있고 싶어서.....”라고 어렵게 얘기한다. 약간 눈치를 채긴 했어도 아놀드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둘러대며 부인을 자기 방으로 돌려보내 버린다.

서점에서 <당신이 원하는 결혼 생활(You can have the marriage you want)>이라는 책을 보고 해결책을 찾고 싶은 케이는 남편과 함께 저자가 운영하는 ‘부부 상담 전문 센터(Center For Intensive Couples Counseling)’를 찾는다. 상담을 하는 펠드 박사(스티브 카렐)는 오랜 시간 쌓인 상처를 서로에게 보여주고, 밤새도록 껴안고 자라는 것. 섹스 횟수는 어떤지, 오르가즘은 느꼈는지, 구강 성교를 좋아하는지, 성인용품을 써봤는지, 성적 환상(fantasy)은 무엇인지,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생각해 봤는지, 그리고 침대가 아니라 바닥에 구르면서도 해봤는지 등 낯 뜨거운 질문들을 계속 꺼낸다. 아놀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담이란 게 효과도 없어 보아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메릴 스트립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 2006)’에서도 함께 호흡을 맞췄던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이 중년의 삶과 성을 부끄럼 없이 풀어놓은 작품이다. 다소 웃음 짓도록 만들어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년들의 문제를 그대로 반영한 이야기이다. 대게는 타성에 젖어, 포기하고 지내게 되는 삶에 대하여 답은 아니었어도 방향은 제시하고 있다. ‘그래도 함께 노력해라.’ 이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부족했던 점은 심리의 문제이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리비도’라고 했다. 영화는 행위의 노력만이 아니라 감정을 되찾는 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노년의 성

노년기의 성생활은 일반인들에게 잘못 인식되어 나이가 들면 욕구가 떨어지거나 기능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에 성에 대한 생각이 없어진다고 여긴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어도 많은 사람들은 젊었을 때와 비슷하게 성 충동이 생기고, 성관계를 통해 만족하고자 한다. 남성 어르신의 경우에 음경의 강직도가 떨어지고, 고환도 다소 줄어든다. 발기를 위한 자극은 더 세야만 하고, 정액의 양은 감소한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은 30세가 지나면서는 줄어든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상대방에 대한 좋은 감정과 적절한 자극만 있다면 결코 젊었을 때보다 성 능력이 떨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다면 남성 호르몬도 젊은 시절과 비슷한 수치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비아그라 이후 개발되는 발기부전 치료제들도 적당한 방법이다.

여성은 폐경이 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체 변화가 많다.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은 감소하고, 질벽의 탄력성은 줄어든다. 질내 윤활작용이 약하고 건조해져 성관계가 원활하지 못할 수 있다. 질내 산성도가 감소해서 세균 감염이 잘 되어 방광염도 생기기 쉽다. 건강한 노년 여성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성기능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문제들은 여성호르몬 요법이나 성관계를 할 때 윤활액을 바르는 등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도 정상이고, 오히려 임신에 대한 우려가 적어 편안한 마음에 성 욕구가 더 생길 수 있다고 한다.

노년에 찾아온 사랑

나이가 들고 인생의 무미건조함 속에서 사랑을 찾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잡지 표지에 실을 사진을 찍기 위해 오래된 다리를 찾아온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기자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가족이 있지만 그러저러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가 만나서 만들어낸 중년의 사랑 이야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1995)’. 어떤 이는 청년일 때 이 영화를 보고는 이해 불가, 결혼하고 나서 볼 때는 그럴 수 있지, 중년이 되어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봤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가는 인생의 기로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이다.

부인을 여의고 혼자 사는 70대 중반의 루이스 워터스(로버트 레드포드)와 애디(제인 폰다)의 노년의 사랑을 다룬 ‘밤에 우리 영혼은(Our Souls at Night, 2017)’도 볼만하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주무실래요? 난 외롭거든요. 당신도 그럴 거 같아요.” 서로 배우자를 잃고 외롭게 살아가던 노년 남녀의 로맨스를 다뤘지만, 내용이나 주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멋있고, 엄청난 두 배우가 그들의 얘기를 연기하는 것 자체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찍던 때, 제인 폰다는 80살이었고, 로버트 레드포드는 81살이었다. ‘러블리, 스틸(Lovely, Stil, 2008)’도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만들어졌다.

노년의 이별

근래 황혼 이혼이 늘고 있다고 한다. 현실은 앞의 영화들과 다르게 나이가 들면서 권태롭고, 의미를 못찾는 삶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끌림이 없이 정 때문에 살기 위해 무미건조한 부부 생활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과감하게 서로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도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지, 이런 고민을 할 시기가 나이가 들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Hope Gap, 2019)’ 영화는 그런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영국 해안 지역인 시포드(Seaford)를 배경으로 했는데, 이곳은 하얀 해안 절벽이 유명한 곳이다. 영어 제목인 ‘호프 갭(Hope gap)’은 그곳 바닷가에서 물이 빠지면 돌 웅덩이에 물이 고이는 곳들이 많이 만들어지는, 작은 지명이다.

시를 편집하고 책을 쓰는 지적인 여성 그레이스(아네트 베닝)는 고등학교 역사 선생인 남편 에드워드(빌 나이)와 29년을 함께 살아왔다.
“(그레이스) 다음 주면 결혼 29주년인데 외식할까?”
“(에드워드) 당신이 원하면 그러지, 뭐.”

당신이 원하면? 이 말에 그레이스는 화가 나고 남편과 다투게 된다. 사실은 오랫동안 에드워드는 아내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마음 먹고 있었고, 아내가 말을 걸어도 건조한 말투로 대답하곤 했다. 이렇게 다투는 김에 아내를 떠나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래도 사랑이라고 믿고 살아왔는데, 모두 위선이었나? 에드워드가 짐을 싸고 나간 텅 빈 집에서 그레이스는 황폐해져만 간다.

노인이 등장하지 않는 노인 영화

노년 이야기를 다루면서 영화를 고르다가 제목만 보고 선택하고는 다 보고 나서 속았다고 느껴지는 영화가 있다. 바로 코언 형제가 감독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2007)’가 그렇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런데 노인들은 왜 안 나오지?” 영화의 백미는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의 엽기성이다. 청부살인을 맡아서 해결을 하는데, 총을 쏘는 게 아니라 공기통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며 일을 끝내고, 잔인하지 않으면서 은근히 두렵게 만드는 미소..... 이 영화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의 냉혈한 연기는 최고였다.

영화는 제목이 원작인 코맥 매카시의 소설에서 만들어진 건데, 작가는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의 시에서 제목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 시의 제목은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이다. 시에서 ‘저기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네(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라고 시작한 것은 세상에 자비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이츠는 나이가 든 자신을 돌아보면서 꿈과 이상의 장소인 ‘비잔티움’으로 가려는 마음을 담아 시를 썼고, 시 원문을 봐도 영화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다, 영화에서는 간간이 노인들이 등장하고, 스쳐가는 얘기로 노인 관련 내용이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장면들은 전체 주제와도 거리가 멀다. 아마도 영화 내용처럼 ‘세상에 자비란 없다’는 것을 옛 시인의 글을 빌려 단순히 묘사한 듯하다. 관객들을 힘들게 하는 코언 형제는 나쁘다!

["고병수 의사의 ‘영화 속 의학의 세계’" 연재기사]

고병수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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