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수(아버지) : 지난번에 이어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나보자.

고동우(아들) : 추천해주신 ‘더 파더’란 영화예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막 바뀌니까 헷갈렸는데, 나중에야 보여주려는 의도를 알게 됐어요. 주인공이 너무 연기를 잘 해서 감탄했어요.

고병수 : 치매(Dementia)는 한자로 ‘癡?’라고 쓰는데, 두 글자 모두 어리석거나 미치광이라는 뜻이야. 오래전 일본의 정신의학자가 만든 말을 중국, 대만과 함께 한자 문화권이었던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부터 썼다고 알려져. 단어가 비인격적이라고 해서 일본은 2004년에 인지증이라는 공식 표현으로, 대만에서는 실지증, 중국이나 홍콩에서는 뇌퇴화증으로 바꿨어.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되고 있지만, 한자 그대로 사용하지 않아서 단어의 부정적인 뜻을 잘 못 느끼고, 이미 고착화된 상태라 과연 바꾸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반대론도 강하단다.

오늘은 음악을 들으며 맛있는 차를 끓여서 마셔야겠다. 주전자에 물을 넣고.....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네? 누구냐고 물으니 앤이라고 말한다. 앤은 내 큰 딸 이름인데, 이 사람이 딸이라고 우기면서 제집인 양 들어와서 집안 물건을 막 만진다. 그리고 어떤 낯선 놈이 거실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네? 넌 또 누구냐고 물으니 결혼한 지 10년이 넘은 앤의 사위 폴이라고 말하며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치매 노인의 눈으로 본 가족들

2020년에 제작한 ‘더 파더(The Father)’는 1937년생, 80대 노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의 혼란스러움을 관객들에게 똑같이 느끼게 하며 시작한다. 영국 런던의 고급 아파트에서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던 그는 갑자기 집안의 모든 것이 달라져서 숨이 막힌다. 폴이라는 사위나 큰 딸 앤(올리비아 콜맨)은 다른 얼굴이었다가 다시 제 얼굴로 돌아오고, 둘째 딸 루시의 그림이 있었는데, 벽에서 사라졌다. 안소니는 이 모든 것이 욕심 많은 앤이 이상한 놈을 데리고 들어와서 자기 집을 뺏으려는 수작이라고 판단한다. 어림없는 수작이지. 고생해서 이만큼 살게 됐고, 30년 넘게 살아온 내 소중한 집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방진 놈과 딸에게 넘겨줄 수 없지, 라고 다짐해본다.

하지만 거듭되는 기억의 혼란은 그를 힘들게 한다. 딸 앤과 사위 함께 셋이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 내용이 반복되어 일어나고, 앤은 결혼한 지 10년 된 사위와 잘 살고 있다는데, 또 이혼한 지 5년 됐다고도 하고..... 자기를 닮아서 똑똑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루시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건지? 사실 둘째 루시는 사고로 중환자실에서 있다가 사망하고 꽤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루시와 자기를 비교하는 것이 앤에게는 기분 나쁘지만 그것보다 기억이 뒤섞이면서 아버지의 치매가 점점 심해진다는 것이 더 걱정이다.

치매는 과거에 ‘노망났다’고 표현하며 비하하던 질병이다. 그 원인을 몰랐기 때문이며 단지 나이가 들면 접어드는 단계려니 생각했다. 대게 인지장애란 것이 생기는데, 그것은 시간?장소(공간)에 대한 혼란이나 무지가 생기고 사람을 못 알아보는 단계까지 가게 된다. 게다가 자꾸 시계에 집착해서 어떤 사물에 꽂히는 것이나 늘 입던 옷인데 팔을 끼우지 못하는 것, 감정의 기복이 심한 것도 특징이다. 안소니는 이미 시간과 공간, 사람에 대한 인지장애가 심해서 중증 치매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이처럼 치매가 가지는 여러 증상들을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를 통해 보여주려고 한다. 증상 표현이 너무 잘 되서 이 분야에 대해 치밀한 연구를 한 느낌이 들게 된다.

가족이 바뀌고, 간병인도 바뀌고, 집마저 자기 집이 아니라고 하며, 집에 있는 물건들도 다 바뀌는 상황인데도 모르는 자신이 너무 황망하다. 이 모든 것에 지쳐버린 안소니는 앤에게 묻는다. “Who am I(나는 도대체 누구야)?” 해결이 안 되지만 안소니는 현실 상황에 조금씩 적응하려고 한다. 더 이상 힘들고 싶ㅈ지 않기 때문이다. 몰라도 아는 척, 봤던 것이지만 못 본 척.

알츠하이머 치매

이 영화가 뛰어나다고 모두의 찬사를 받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치매와 관련된 영화와 다른 독특한 관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대부분을 치매에 걸린 안소니의 처지에서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그러다보니 영화 도입부에서 관객들이 어리둥절하게 된다. 같은 사람인데 출연하는 인물들이 바뀌고, 이혼한 딸이 사위와 나타나고..... 좀 지나서야 아하, 안소니가 이렇게 보인다는 뜻이구나, 하면서 영화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게 된다. 또 하나의 이유는 두 배우의 놀라운 연기이다. 큰 딸 앤 역할을 하는 올리비아 콜맨도 그렇지만 아버지로 나오는 안소니 홉킨스의 놀라운 연기는 대단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상대방이 없이 혼자 하는 1인극처럼 치매 걸린 노인의 역할을 이보다 더 잘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요양원에 들어온 그는 있는 곳이 요양원인줄도 모른다. 뭔가 서먹하기만 하고 슬프다. 우울한 안소니를 토닥이며 간호사가 묻는다.
"날씨가 좋은데 우리 산책 갈까?"
"안 가."
"그럼, 옷 갈아입을까?"
"싫어."
“엄마가 보고 싶어.”
“나, 집에 갈래.”
투정부리는 3살 어린애마냥 간호사의 품에 안겨서 울음을 터뜨리는 안소니. 그의 모습에서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 1991)’, ‘한니발(Hannibal, 2001)’에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렉터(안소니 홉킨스)의 영민하고 잔인한 이미지는 전혀 겹쳐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둘의 모습에서 침대로, 딸 둘과 찍은 탁상 사진으로, 그의 소지품으로 옮겨가고,  의자를 지나 창문을 넘어간다. 거기에는 눈부신 햇살에 푸른 잎사귀들이 반짝이고 있다.

미국인들의 통계로는 약 500만 명이 치매를 앓는다고 알려져 있고, 앞으로 30년 안에는 1,500만 명 이상에게 생길 것이라고 한다. 한국도 최근 80만 명 정도가 앓고 있다고 하며, 30년 후에 300만 명이 넘어설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 원인은 알츠하이머 치매가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 뇌혈관이 나빠져서 생기는 혈관성 치매와 앞서 로빈 윌리암스에게 생긴 것 같은 루이소체 치매 등이 그 뒤를 잇는다. 알츠하이머 치매는 독일의 정신의학과 의사이자 신경병리학자인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 1864~1915)가 치매로 죽은 환자의 뇌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던 중, 있지 말아야 할 이상단백질들이 뇌 속에 퍼져있는 것을 보고 그 원인으로 밝히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질환이다. 고령, 여성, 저학력, 다운증후군, 치매 가족력 등이 중요한 유발 인자라고 했지만 최근의 연구로는 똑똑하고 젊은 사람들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베타 아밀로이드나 타우 단백질이라는 이상단백질들이 쌓이면서 뇌 신경세포들을 서서히 죽이게 되는 퇴행성 질환이다. 인류가 아직까지도 정복하지 못한 병중의 하나로, 치료제들은 병의 진행을 더디게 하는 정도이다.

["고병수 의사의 ‘영화 속 의학의 세계’" 연재기사]

고병수 의사

김규철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