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선 의원까지 지낸 첫 정치인 출신 국가보훈처장. 어렵다는 외무고시와 사법고시를 둘 다 패스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자랑하고 지난 대선 때는 윤석열 후보의 핵심 브레인으로 활동. 프로필만 봐서는 냉철하고 차가운 인상이어야 할 것 같지만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장관급)의 첫 인상은 '소탈한 부산 사나이'에 가까웠다. 22일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만난 박 처장은 일곱살 때 베트남전에서 아버지를 잃은 '원호대상자'였을 때 느꼈던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보훈에 대한 사명감을 털어놨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22일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가진 내일신문과 인터뷰에서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전통이 선진국이 되는 중요한 열쇠"라고 강조했다. 사진 이의종


■국가보훈처장 취임 후 40일이 지났다.

5월 13일 취임하자마자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등 보훈 행사, 17개 보훈단체와 국회 등 유관기관 방문, 전국 보훈관서장 회의, 현충일 추념식을 비롯한 호국보훈의 달 행사 등으로 바쁘게 지냈다. 국가보훈처장직을 수행해보니 보훈의 역할과 업무영역이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전몰군경의 아들로서 보훈행정을 맡게돼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아버지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일곱 살 때 전사하셨다. 일제강점기엔 경남 거창 신원초등학교 동맹휴학사건을 주동해 10여일 간 구속된 이력도 있으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가 36살이셨는데 6남매를 장사해 가면서 어렵게 키우셨다.

어릴 때 아버지 돌아가신 후 받은 느낌을 돌이켜보면 '아비 없는 자식'으로서 뭔가 부끄러운 느낌, 죄책감같은 게 있었다. 가정환경조사를 하면서 선생님이 '원호대상자'도 손을 들게 했는데, 그때마다 위축되고 잘못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보훈은 돕고 보살핀다는 뜻의 '원호'의 개념에서 국가를 위한 희생·헌신에 합당한 보상과 예우의 개념으로, '원호청(처)'는 국가보훈처로 변화·발전했지만 아직 부족한 면이 있다. 어찌 보면 지금의 국가보훈처는 말만 국가보훈처이지 1960년대의 원호청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보훈가족의 한 사람으로,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자긍심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문화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오랜 희망이었다. 이를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박 처장은 '기국비기국(基國非其國)'을 직접 쓰며 "독립운동이나 호국하신 분에 대해 제대로 예우를 못 갖추면 그게 비기국(나라가 아님)"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초등학생 박민식의 마음 깊숙이 들었던 의문은 '왜 부끄러울까'였다고 한다. 나이 들어선 '국가가 미안해해야 할 일인데, 왜 내가 부끄러웠을까'로 바뀌었다. 어쩌면 보훈에 대한 관심과 소명의식도 이때부터 생긴 것 같다. 박 처장은 "국가유공자와 가족들이 느껴야 할 감정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긍심"이라면서 국가유공자들이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보훈처장으로서 가장 하고 싶은 일로 들었다.


■보훈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이 상당히 높아 보인다.

윤석열정부의 이른바 '시그니처'는 보훈철학이라고 본다. 정부마다 기존 다른 정부와 차별화된 부분이 있지 않나. 윤 대통령은 보훈 관련해서 자주 말씀을 하셨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선 핏대를 올리기도 하신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제대로 기억되고 존중되고 예우를 받아야 나라의 기강과 중심이 서는 것 아니냐는 말씀이다. 독립운동하신 분들이 저평가되고, 풍찬노숙하면서 독립운동한 후손들이 학교도 제대로 못 가고, 사회에서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식으로 내팽개친다면 누가 나라가 위기일 때 독립운동하듯 나서겠느냐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셨다.

저 나름의 해석을 단다면 옛날 임진왜란 때 일본이 침략을 해서 한양도성이 불타고 했을 때 역사에 따르면 백성들이 왕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안 나섰다고 한다. 봉건국가와 지금 근대국가를 평면적으로 비교하기 어렵지만 당시에 기국비기국(基國非其國)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나라는 나라인데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다.

겉만 나라면 뭐하겠나. 독립운동이나 호국하신 분에 대해 제대로 예우를 못 갖추면 그게 비기국이다. 공동체의 위기 때 전쟁이 났을 때 팔 걷어붙이고 나라를 위해서 뛰어나가야 해야 하는데 그 핵심요소가 보훈이라고 보는 거다. 기국비기국이 아니라 기국을 기국으로 만드는 게 보훈이라고 대통령도 확실하게 생각하시는 걸로 안다.

■새 정부 국정과제로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나라'가 꼽혔다.

현충일 추념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제복 입은 영웅들이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씀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군인,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가 사회 전반에 문화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미국 예를 들고 싶다. 지금도 6.25전쟁에서 한강에 추락한 조종사 유골을 찾겠다고 수십억을 쓰며 이역만리를 뛰어오는 나라가 미국이다. 길거리에서 군인을 만나면 "당신의 헌신에 감사한다(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인사도 건넨다. 이렇게 제복근무자에게 감사하는 사회문화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 모두가 군복무를 영광스러운 일로 여기는데, 이게 바로 미국이 세계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지난 20일 국가보훈처는 6.25 참전용사에 대한 사회적 존경과 상징성을 담은 제복이 필요하다고 보고 국내 정상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여름 단체복을 개발해 공개했다. 사진제공 국가보훈처

실제로 국가보훈처는 '제복에 대한 존중'이 자연스럽게 체화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내서 추진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와 함께 추진한 '보훈, 야구를 만나다' 라는 프로젝트는 그 중의 하나다. KBO와 국가보훈처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기념해 밀리터리 유니폼을 착용하거나 국가유공자를 초청하는 등의 다양한 이벤트를 실시했다.

6.25전쟁 72주년을 앞두고 참전영웅들을 예우하고 감사하는 보훈문화 확산을 위해 '제복의 영웅들' 프로젝트도 추진중이다. 6.25 참전용사에 대한 사회적 존경과 상징성을 담은 제복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국내 정상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여름 단체복을 개발했다.

"우리는 군인에게는 '군바리', 경찰에겐 '짭새'라면서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하잖아요. 제복을 입은 영웅들에 대한 존경과 예우가 사회문화로 자리잡아야 나라가 정말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들이 팔 걷어붙이고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복회 부정비리 관련 논란이 있었다.

광복회가 우리 산하 관리 감독하는 유관단체로 17개 중의 하나지만 17개 단체 중의 하나라기보다는 상징성이 큰 단체다. 최근 몇년 사이 보면 광복회 운영이 상당히 국민들 눈쌀을 찌푸리게 한 걸 넘어서 급기야 조롱거리로 전락했다는 평가가 없지 않다. 광복회의 상징성을 고려해서 '광복회 바로세우기'라고 해야 할까 보훈처가 관리감독기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취지로, 조만간 국민들께 광복회의 부정과 비리, 잘못된 점 등을 낱낱히 공개할 계획이다. 면밀하게 살펴본 결과를 공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도 취할 생각이다.

광복회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가 아주 심각한 상황이다. 국가보훈처의 최고 역할이 독립 호국 민주이고 그 중 최고가 독립인데 독립정신을 훼손했다든지, 폄훼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고 하면 그걸 바로잡는 게 독립 또는 광복의 정신을 되살리는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보훈처가 그동안 장관급과 차관급 사이를 오갔다.

보훈 현장을 찾을 때마다 첫 번째로 듣는 말이 "보훈부 승격 언제 되냐"는 이야기다. 미국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국가보훈처에 해당하는 '제대군인부'는 국방부 다음 두 번째 규모이고, 대통령이 신년 예산을 발표할 때 보훈예산을 가장 먼저 발표한다. 모든 선진국은 국가보훈부가 명칭을 달라도 정부조직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보훈은 그 나라의 품격을 말하는 거라고 본다. 우리나라도 세계적 위상을 갖춘 나라로 거듭났기 때문에 보훈처의 위상이나 역할도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야한다.

덧붙여서 새 정부 탄생 때마다 그 정부를 상징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부부처 개편이 이뤄지곤 했다. 환경처가 환경부로 바뀌었고, 중소기업청이 중소벤처기업부가 됐던 예가 있다. 이런 개편은 국민들에게 새 정부의 성격을 알리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다. 그런 측면에서 윤석열 정부에서는 국가보훈처를 부로 격상시키는 걸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대통령이나 국회의 결심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관료 내 여러가지 장애물이 있는데 처장으로서 좀 더 적극적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돌파하겠다.

■보훈의 영역은 독립, 호국, 민주 3가지 영역이다. 진보정부는 민주와 독립에, 보수정부는 호국쪽에 치우쳤다는 평가가 있다.

'보훈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보훈이 불필요하게 정쟁의 대상이 되어온 점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사실 독립, 호국, 민주 모두 시기만 다를 뿐 질곡의 역사 속에서 '자유와 평화'라는 보편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국민들의 용기와 애국이다. 모두 다 자랑스러운 역사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의원들이 참석한 것에서도 이런 인식을 볼 수 있다. 대통령의 보훈철학이기도 하다.

지난 5월 29일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이 별세하셨을 때 저도 직접 조문했고, 고인이 신속하게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앞으로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고 균형있게 업무를 수행해서 세 가지 가치가 국민과 미래세대에게 더 잘 알려지도록 하겠다. 보훈이 '국민통합'이라는 본래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하겠다.

■최근엔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여성, 학생들의 서훈이 늘어나는 것 같다.

독립유공자를 발굴·포상하고 그 정신을 기리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라고 본다. 보훈처는 2018년 포상심사 기준을 개선해 독립유공자 포상을 확대해 오고 있다. 옥고기준 완화나, 여성 특수성 인정 등이다. 앞으로도 관련 자료를 적극 수집·분석하여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할 계획이다. 그간 포상되지 못한 분들에 대해서도 미포상 사유를 분석해서 개선된 심사기준 적용이 가능한 분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재심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했는데도 포상되지 못하는 억울한 사례가 없도록 하겠다.

■2024년 총선 출마를 궁금해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다.

우선 국민의힘을 탈당한 상태라는 점을 말씀드린다. 정치인이었을 때 하던 SNS도 모두 닫았다. 현재로선 첫째도 보훈, 둘째도 보훈, 셋째도 보훈이다. 대한민국을 바로세우는 가장 중요한 키가 보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보훈처장으로 일하는 동안에는 정치인 박민식을 잊어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각오나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탱크·전투기 만드는 게 우리 국방의 중요한 일이라고 하고, 자동차·반도체 만드는 게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중차대한 일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지만 전투기나 반도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헌신한 사람들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의 전통을 확실하게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게 대한민국이 최선진국이 되는 중요한 열쇠라고 믿고 있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거기에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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