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관점 인권보고서에 평가대상국 반감 고조 … '민주주의 정상회의' 편가르기 논란

미국은 민주주의 '1타 강사'다. 세계 각국을 상대로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규범을 설파했다. 인권 분야까지 범위를 넓히면 경쟁상대는 더 없다. 자신감과 힘까지 겸비했다는 의미다.

이런 위상이 최근 수년 사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민주주의 지표는 계속 추락했고, 미국의 인권간섭에 공개 반발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 시위대의 워싱턴 국회의사당 난입은 미국 민주주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남의 나라 민주주의와 인권을 거론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라는 얘기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위기감을 감추기라도 하듯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한층 더 강조한다. 얼마 전 나온 인권보고서와 29일부터 이틀간 진행되는 '제2차 민주주의 정상회의'가 단적인 예다.

"제 눈의 들보나 잘봐라"

지난 20일(현지시간) 미 국무부가 공개한 전세계 194개국의 인권보고서는 적잖은 반감을 샀다. 바로 다음날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남의 눈에 티끌만 보고 제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한다"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미 국무부가 '범죄자에 대한 멕시코의 불처벌과 낮은 기소율이 우려될 만한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한 데 대한 반발이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완벽한 정치적 함의가 있는 문서로, (작성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자신들이 세계 정부라고 믿으며 변화하지 않고 있는 게 그들의 본성"이라고 직격했다.

2021년 1월 6일(현지시각) 당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전년도 11월 대선 패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미 의회 의사당에 난압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날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역시 내전 기간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를 저질렀다는 미국의 비난에 대해 "선동적"이라며 반발했다. 에티오피아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미국의 비난은 부당하며 에티오피아의 포괄적인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퇴색시킨다"고 말했다. 에리트레아 외무부도 성명을 내고 "실체적 근거 없이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비난했다.

2년간의 내전 기간 에티오피아 정부군(END)과 에리트레아군, 암하라 지역군 등 동맹군은 물론 TPLF 반군 등 모든 당사자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미 국무부 인권보고서 주장에 대한 정면 반박이다.

한국정부에 대한 국무부의 태도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인권보고서에서 MBC의 비속어 보도 논란을 기술하면서 붙였던 소제목을 하루 만에 삭제했기 때문이다.

당초 인권보고서에는 지난해 9월 윤석열 대통령의 뉴욕방문 당시 불거진 '비속어 논란'과 관련해 "윤 대통령이 외국 입법기관을 비판하는 영상을 MBC가 공개한 뒤, 윤 대통령이 동맹을 훼손해 국가 안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언급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소제목을 '폭력과 괴롭힘'(Violence and Harassment)이라고 했다가 하루 만에 삭제했다. 대신 미국과 함께 제2차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한국이 강한 민주주의 국가이며, 전세계 인권 보호를 위해 한국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주주의 정상회의 공동 개최국이자 4월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둔 점 등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국무부 인권보고서 역시 상당히 정치적임을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갈등 키우는 민주주의 정상회의

미국이 주도하는 '제2차 민주주의 정상회의'가 29일부터 이틀간 화상으로 열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과 함께 야심 차게 밀어붙인 이 행사는 2021년 12월 1차 회의 이후 두 번째다.

이번 2차 정상회의는 미국과 함께 한국 네덜란드 잠비아 코스타리카가 공동 개최국으로 참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정상급 인사들이 참여하는 본회의는 29일 진행되며, 110여개국 정상과 유엔 등 국제기구 수장이 초청됐다. 윤 대통령은 첫날 회의에서 경제 성장 부문 세션을 주재하며, 장관급으로 확장된 둘째날 회의에서 한국은 부패 대응 세션을 주관한다.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은 "한국이 민주주의 증진에 기여하는 국제사회 리더십을 발휘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미 국무부 홈페이지에는 "자유 기회 정의는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에서 번성한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바이든의 발언과 함께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소개하는 별도의 섹션이 마련돼 있다.

국무부는 "민주주의와 인권은 전세계적으로 위협받고 있다"면서 "전세계적으로 취약한 국가 역량, 미약한 법치, 높은 불평등, 부정부패가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약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 "우리는 민주주의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삶을 가시적인 방식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면서 "이번 정상회의는 성찰하고, 경청하고, 배우고, 계획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글로벌 민주주의 쇄신을 위한 공동의 기반을 구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미국이 민주주의와 인권, 반부패를 앞세우며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반감과 불신이 커지고 있다.

당장 1차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정상회의 참가국 선정을 둘러싼 논란이 만만찮다.

중국과 러시아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과 가깝다는 이유로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어울리지 않은 독재국가 지도자들을 초청하는 무원칙을 보여줬다.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있지만 결국엔 미국 패권주의의 다른 모습이라는 지적이 커지는 이유다.

2차 정상회의를 앞두고 중국 외교부가 또 다시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도 이런 기류와 무관치 않다.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15일 정례브리핑에서 "1년여 전 미국은 '민주주의'를 내걸고 이른바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해 공공연히 이념적으로 선을 그어 세계에 분열을 조장했다"면서 "미국의 일부는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등대'라고 부르지만 과연 미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좋은가"라고 반문했다.

또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약 1/5만이 미 연방정부를 신뢰하며 이는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이라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자국민조차 신뢰하지 않는데 그들이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를 비판할 권한이 있는가"라고 비판했다.

중국 외교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난 20일 미국의 민주주의 민낯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장문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미국 민주주의가 만성질환에 빠져 있으며, 미국의 민주주의 강행이 전세계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는 것이 중국 외교부 주장이다.

미국 민주주의가 더 위험

실제로 미국 민주주의 지표는 갈수록 악화하는 실정이다. 영국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의 부설 경제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지난 2월 발표한 '2022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해보다 4단계 내려간 30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전년에 비해 8단계나 내려갔지만 24위다. 미국 민주주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EIU는 2006년부터 167개 국가를 대상으로 5개 부문의 점수를 매겨 민주주의 지수를 발표해 왔는데 총 10점 만점으로, 8점을 초과하면 '완전 민주주의', 6점 초과 8점 이하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 4점 초과 6점 이하는 '민주·권위주의 혼합 체제', 4점 이하는 '권위주의'로 분류한다.

8.03을 기록한 대한민국이 완전 민주주의로 분류된 것과는 달리 미국은 7.85를 얻어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된다. 더구나 올해가 처음이 아니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2016년부터 바이든행정부까지 계속 '결함있는 민주주의' 국가에 머물고 있다.

또 다른 지표에서도 비슷한 추세다. 스웨덴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의 최신 분석자료에 따르면 2021년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지수(LDI)는 0.74로 29위에 그쳤다. 한국이 0.79로 17위를 기록한 것에 비춰보면 미국이 과연 민주주의 모범을 자처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V-Dem은 또 다양한 지표를 근거로 정권유형을 폐쇄적 독재, 선거독재, 선거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4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중 거의 최하위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머잖아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 지위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 V-Dem의 공식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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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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