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을 둘러싼 다양한 의문점과 진실에 대해 안보전문가 권영근 박사의 저서 <한반도와 강대국의 국제정치>를 근거로 기존 시각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봤다. 당시 한반도를 놓고 각축을 벌이던 미국 소련 중국 등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에 놓고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을 재해석하면서 그동안 이해하기 힘들었던 의문들도 상당히 풀렸다.

1951년 10월 11일 판문점에서 미군 제임스 머레이 대령(오른쪽 가운데)과 북한 공산군 장춘산 대령(왼쪽)이 분계선 남북경계를 표시한 초기 지도를 보며 휴전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 미 국방부


그 마지막 순서로 정전협정을 살펴본다. 정전협상은 1951년 7월 10일 시작됐다. 그리고 당시 많은 사람들은 머지않아 협정이 체결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협상을 시작한 뒤로 꼬박 2년을 더 끌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과 자원의 피해를 불렀다. 38선 부근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고지쟁탈전이 바로 이 기간에 벌어졌다.

◆소련의 제안, 당황한 미국 = 1951년 6월 23일 유엔주재 소련 대표였던 야콥 말리크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모든 외국군은 전투를 중지하고 38선에서 물러나 정전 협상을 시작해야한다"고 방송했다.

말리크의 정전협상 제안 방송에 대해 영국 외무성은 "영국과 여러 나라가 바로 오랫동안 기다리던 말"이라며 환영했고, 트리그비 리 유엔사무총장은 휴가 도중에 달려와 "희망찬 평화의 신호"라며 반겼다. 또 중공 마오쩌둥은 즉시 "동의"를 선언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한국전쟁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윌리엄 K. 해리슨 장군(왼쪽)과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 남일 장군(오른쪽). 사진 미 국방부


트루먼 대통령도 성명을 통해 "한국전쟁 1주년을 맞아 한국의 평화와 안전을 가져오는 화평안이라면 언제나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며 "말리크 소련 대표의 제안이 세계평화를 위함이라면 어떤 수단이라도 취하여 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말리크 제안에 거의 모든 나라가 쌍수를 들어 환영한 셈이다.

하지만 트루먼의 진짜 속내는 달랐다. 미국이 소련의 정전협상 제안을 수용하는 경우 세계정세는 빠르게 긴장이 완화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트루먼 행정부 대외정책의 목표는 긴장 조성과 유지였다. 한반도에 평화가 도래하는 경우 미국은 대만을 중국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고, 중국의 유엔가입을 저지할 수 없었다. 또 일본의 재무장과 일본에 미군기지를 유지하게 하는 평화협정도 강요하기 힘들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미 본토와 해외에서 미군 재무장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게 불가능했다.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로 각각 작성된 정전협정문.


이런 판단이 서자 미국은 말리크 제안에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미 국무성은 "선전선동 이상의 것이라면 6.25전쟁을 종료시키기 위한 적절한 방안이 있을 것"이라고 했고, 에치슨은 "소련인들이 한편으로는 평화를 외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1951년 7월 4일 연설에서 트루먼은 "6.25 전쟁이 종료되는 경우에서조차 우리는 장기간 동안 세계적인 긴장과 국제사회의 상당한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맥아더는 7월 11일 뉴욕데일리뉴스 인터뷰에서 "한반도 정전 이후 군사력을 감축하는 경우 미국은 덫에 걸린 생쥐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협상 아젠다 놓고 기싸움 = 정전협상은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됐다. 미국은 정전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놓고 최종합의한 이후에나 적대행위를 중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해 1월 미국이 '선 종전' '후 협상'을 외쳤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1951년 1월은 중국군이 전황을 주도하는 상황이었지만, 정전협상을 시작할 무렵인 7월에는 유엔군이 주도하는 상황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해 7월 10일 조이 제독은 리지웨이 대장이 서명한 공식성명서를 통해 "공산군과 유엔군의 적대 행위는 정전 조항에 관해 당사국이 합의하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이다. 승인받은 정전위원회가 가동하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협상 아젠다를 놓고 공산측과 유엔군측의 기싸움이 팽팽했다. 진통을 거친 뒤 양측은 4개 항의 아젠다에 합의했다.

합의된 아젠다는 △적정 위치에 군사분계선을 설정한 뒤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공산측과 유엔사측 사이에 완충지대 설치 △전투를 중지하고 정전을 감독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 △포로송환 절차 △공산측과 유엔사측에 권고할 사항이었다.

◆조기타결 꺼린 미국 = 협상이 시작되자마자 첫 과제인 군사분계선 위치선정을 두고 다시 갈등이 빚어졌다. 공산측은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유엔사 측은 당시 양측이 접촉하고 있던 선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북쪽의 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애물이 거의 없는 38선으로는 군사적 방어가 쉽지 않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38선의 대안으로 오늘날의 휴전선인 캔사스-와이오밍선이 제기됐다.

유엔군이 캔사스-와이오밍선을 대부분 확보했던 8월 6일 리지웨이 장군은 미 언론매체와 인터뷰에서 방어가능한 군사분계선은 "현재 유엔군이 전반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선"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북한측은 처음에는 38선을 주장했지만 8월 중순이 되면서 "조정할 수 있다"는 의향을 밝히기 시작했다. 8월 18일, 19일이 되면서는 언론을 통해 공산측이 양보했고, 합의시점이 가까워졌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8월 19일 아침 유엔군이 공중과 지상에서 정전협상 이후 가장 강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 유명한 '피의 능선' 전투가 시작됐고 유엔군이 능선을 점령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듯 2700명의 유엔군과 1만5000명 정도의 공산군 사상자가 나왔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피의 능선 전투를 시작한 유엔군은 공산군의 병참선과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한 '숨통압박 작전'이란 별칭의 항공작전을 수행했다.

또 하나 8월 19일 일부 무장군인들이 개성 중립국 지역의 공산측 헌병분대를 공격해 지휘관을 살해한 일이 벌어졌다. 미군의 소행이었다. 이밖에도 공산측 협상대표 팀이 몇 차례 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근거로 공산측은 8월 23일 협상을 중지시켰다. 미군은 자신들과 무관하며 공산측의 조작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당시 공산측은 협상을 중단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미국과 일본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앞두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주변국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허용하는 평화협정을 체결을 추진 중이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정전협상이 결실을 보게 되면 일본과의 평화협정 명분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정전협상이 중단된 8월 23일부터 협상이 재개된 10월 25일까지 유엔군은 거의 일방적으로 공산군을 공격했다. 심지어 미국은 핵무기로 북한을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양측 모두 엄청난 희생이 있었던 것은 세계 도처에서 소련의 세력팽창 저지를 위한 미군 재무장과 동맹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6.25전쟁이 자리매김했던 것과 무관치 않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아군의 희생이 필수적이었다. 큰 희생을 치른 뒤 다시 정전협상이 재개됐다. 1951년 10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다. 군사분계선 문제에 대해 공산측이 유엔군 입장을 수용하면서 다시 타결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엔사 측이 당시 공산측이 점령하고 있던 개성을 유엔사측 영토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평지인 개성은 군사적으로 큰 의미가 없었다. 다시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동맹국들은 물론이고, 미국 내에서도 의아하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그해 11월 12일자 뉴욕타임스는 "일부 병사들은 자신의 지휘관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정전협정을 방해하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안보를 외세에 의존해서 안돼" = 1951년 말이 되면서 협상이 재개됐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3가지 남았다. 중립국감시위원회 구성, 정전협정체결 이후 공산측 비행장 건설 및 복구, 포로송환 문제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포로송환 문제는 정전협상이 장기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트루먼은 1949년 제네바회담에서 명시한 포로의 강제송환이 아니고 자유의사에 입각해 송환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6.25전쟁을 공산진여에 대항한 자유진영의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한 전쟁으로 몰고 갔다. 이 같은 방식으로 정전 시점을 지연시킴으로써 미군 재무장과 동맹체제 구축을 통해 냉전 승리의 초석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듯 냉탕관 온탕을 반복하던 정전협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은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 때문이었다. 1952년 11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선거 유세 도중 6.25전쟁 조기종결을 약속한 바 있고, 이듬해인 1953년 3월 4일에는 스탈린이 사망했다. 이 과정에 아이젠하워는 공산주의자들이 평화를 간청하게 만들 방안을 마련하라고 미 합참에 지시했다. 미 합참은 최종적으로는 중국을 겨냥해 핵무기 사용까지 가정했다.

스탈린 사후 등장한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국제사회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을 촉구했다. 소련지도자들과 중국의 저우언라이가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고, 소련 지도자들은 전쟁의 조기 종결을 촉구했다. 이처럼 소련과 중국이 전쟁 종식으로 의견을 좁혀갔고 그 내용은 북한의 김일성에게도 전달됐다. 1953년 6월 8일 포로송환에 합의했고, 6월 17일에는 최종 군사분계선 위치에 관해 합의했다. 이 같은 방식에 반발하던 이승만은 2만 7000명에 이르는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이에 반발한 공산군은 6월 24일과 25일 한국군을 강타해 7400명을 희생시켰고, 미국에는 이승만이 정전협정을 준수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막판까지 우여곡절을 거듭한 끝에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정전협상이 시작될 당시부터 미국은 이미 한반도에 유엔군을 장기적으로 주둔시키기로 결심했고, 조기에 협상이 타결돼 평화가 조성되는 것을 우려했다. 협상을 2년 가까이 끌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안타까운 희생이 뒤따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6.25전쟁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우리의 교훈은 무엇일까.

권영근 박사는 △전쟁이 정치적 목표를 겨냥해 수행된다는 사실 △6.25전쟁에서 미국이 추구한 목표는 대한민국 국익이 아니라 미국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 △전쟁 수행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자국의 국익 증진차원에서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이 같은 흐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면서 "국가안보를 외세에 의존하면 결코 안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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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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