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환 언론인, 경기대 교수

독일 유권자들의 투표 행태가 변했다. 5월 15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다. 분단 시절 수도인 본(Bonn)을 둘러싼 '루르' 지역으로 알려진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NRW)주와 북부 지역 슐레비히 홀스타인(SH)주 선거에서 새로운 투표 양상이 나타났다.

NRW주 인구는 1800만명이 넘고, 국내총생산(GDP)은 세계최고 수준인 4652억달러(581조5000억원)로, 네덜란드보다 많다. NRW 지방선거 결과는 기민당(35.8%) 사민당(26.6%) 녹색당(18.1%) 자민당(5.8%) 대안당(5.5%) 순으로 나타났다. 여당 사민당의 참패, 야당 기민당의 승리였다.

독일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새로운 투표 행태는 '합리적인 스윙보터(swing voter)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증오의 '빠'시즘은 몰락하고 중도 스윙보터가 선거 승패와 국정 운영방향을 결정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선진국일수록 정치 상황에 따라 투표하는 유권자인 스윙보터가 많아지는 추세다. 특정 정당에 매몰되지 않고, 문제가 있으면 심판하고 다른 대안정당을 지지한다. 거대 담론이나 정파보다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공약을 선호한다.

독일 여론조사연구소 포르사(Forsa) 분석에 따르면 지난달 NRW주 선거에서 스윙보터의 위력이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사민당 강세지역인데, 유권자들은 녹색당에 투표하거나 기권했다. 투표율은 55.5%로 최저 수준이었다. 녹색당은 2017년 지방선거보다 40만표를 더 얻었다.

정파에 기반한 고정투표 경향 희석

스윙보터의 특징은 크게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정파에 기반한 고정투표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대중정당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미 지난해 총선(총리 및 연방의원 선출)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났다. 낡은 정파적 투표 행태 대신 스윙보터가 자리를 잡았다. 중도좌파 사민당을 지지하다가도 극우 대안당이나 진보인 녹색당을 지지한다. 리버럴 자민당을 지지하다가 보수 기민당 혹은 진보 녹색당에 표를 던진다.

둘째, 정파적인 거대 담론보다 실용적인 문제 해결에 관심이 높다. 그렇다고 핵심가치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 이슈인 경제성장 사회정의 주택해결 등에서도 대중정당인 사민당(각 20~30%)이나 기민당(각 10~30%)에 대한 기대치보다 녹색당(45%)에 대한 기대치가 오히려 높게 나왔다. 에너지와 환경, 학교와 디지털 교육, 교통, 물가 등이 지방선거의 핵심 테마로 부상했다. 거대 정당이 과거 가치에 매몰된 반면 녹색당은 새로운 가치 이니셔티브를 쥐면서 좋은 성적을 올렸다.

셋째, 지방선거는 인물·정책 경쟁이자 차기 리더(총리 후보)가 데뷔할 수 있는 기회다. NRW과 SH 지방선거에서 야당 기민당이 승리하면서 사민당에 승리를 안긴 연방총선 결과가 '허니문'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이끄는 사민당은 지난해 9월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NRW와 SH 지방선거에서는 최악의 성적을 보였다. NRW 사민당의 토마스 쿠차티 주지사 후보가 관행적으로 낡은 선거 전략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승리한 기민당의 헨드릭 뷔스트 주지사는 차기 총리후보로 올라섰다.

넷째, NRW 지방선거에서 사민당은 26.6%라는 역대 최소표를 얻어 위기에 빠졌다. 철저한 반성과 개혁이 없는 '무풍' 정당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전통적으로 사민당 강세 지역인 NRW주이기에 '흑해(기민당의 색깔은 흑색)에 외로이 떠있는 붉은(사민당의 색깔 붉은색) 섬' 신세가 되었다는 혹평이 나온다. 사실 사민당뿐 아니라 대중정당인 기민당도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한국과 독일과의 차이는 진보의 녹색당, 리버럴의 자민당, 좌파의 좌파당, 극우의 대안당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당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기존 정치 심판자로 나선 스윙보터

그럼 스윙보터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을까? 먼저, 심판자 역할이다. 여론조사전문기관 포르사의 만프레드 귈러 대표는 "정파에 기반한 정당 지지층은 무너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권화 된 정치인들이 '그들만의 리그'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정파에 얽매이지 않는 합리적 '스윙보터'들이 심판자로 나섰다.

둘째, 새로운 사회적 이슈 제기와 해결이다. 자유 평등이라는 기존가치에 기반한 테마보다 다가올 미래에 대비하는 유형의 이슈가 중요해진 것이다. '슈퍼시대전환'이라는 용어가 시사하듯, 지구온난화에 대비하는 환경과 에너지 전환, 4차산업혁명을 선도하는 디지털 전환, 미·유럽 대 중·러 대결구도인 신냉전 시대에 외교안보전략 전환 등이다. 게다가 푸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시대전환에 기름을 붓고 있다. 유럽은 탈러시아·탈중국을 외치고 있다.

셋째, 중도우파 기민당과 진보 녹색당의 새로운 협치 유형이다. 우리에 비유하자면 보수인 국민의힘과 진보인 정의당의 연정이다. 독일에서 선거결과는 국민의 명령으로 이해된다. NRW 지방선거 결과로 연방정부처럼 신호등연정인 사민당 녹색당 자민당의 연정도 가능했지만, 1당인 기민당과 3당인 녹색당의 연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협치문화가 정착된 것이다. 독일은 지방선거를 통해 새 정치문화를 창출한다. 지방선거 결과를 받아들인 지방정부 연정이 성공할 경우 연방정부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독일의 정치구조는 '보텀 업'(bottom-up)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스윙보터' 유권자의 새로운 투표 물결은 새로운 정치구조, 새로운 정당문화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치리더십을 만들어내고 있다. 독일에서 새로운 정치인들이 부상하고 있다.

최근 제1공영방송 ARD와 보수지 벨트(WELT)가 여론조사기관 인프라네트 딤프에 의뢰한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녹색당 출신 하벡 경제부장관과 베어복 외교부장관 지지율이 60%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사민당의 숄츠 총리는 47%, 제1야당 기민당 메르츠 대표는 35%였다. NRW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뷔스트 주지사가 차기 기민당 총리 후보로 거명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녹색당 출신 정치인들이 더 높은 국민 신뢰를 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에너지전환,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 제재 등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확하게 이슈화하고,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잘못을 덮거나 감추지 않고 자기반성과 성찰의 언행을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 선거도 스윙보터가 가른다

6월 1일 대한민국의 지방선거 성적표가 나왔다. 낮은 투표율, 4년 만에 국민의힘 압승, 민주당·정의당 패배, 김동연의 신승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평행이론'처럼 한국과 독일 지방선거에서 스윙보터의 파워를 보여주었다. 서울·경기·인천과 충청권에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졌다.

독일에서 야당인 기민당이 승리한 것과 달리 한국에서 야당 민주당이 참패한 원인은 '반성과 성찰' 없는 '대선 시즌2'와 '이재명 지키기' 등 잘못된 정치 철학과 선거 전략 때문이었다. '0.73%p'에 집착하다가 100배인 광역단체장·서울구청장·경기단체장 70%를 국민의힘이 차지했다.

지방선거 결과는 새로운 경쟁, 차기 총선·대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대한민국 선거 승패 역시 스윙보터에 달려 있다. 과연 차기 총선 대선에서 우리나라의 스윙보터는 누구를 선택하게 될까.

지방선거 후 여야는 내부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그런데 승자인 국민의힘은 '정치개혁'을 표방하는 데 반해, 패자인 민주당은 반성과 혁신 없는 '내부 총질'에 몰두한다. 이대로 가면 차기 총선·대선 결과는 뻔하다.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 건강한 야당이 필요하다.

김택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