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 중심으로 후선 배치

직장내 자존감 상실 원인 지목

은행에서 임금피크제에 들어간 선배 직원들의 자존감이 구겨지고 있다. 일부 시중은행과 대부분 국책은행에서 56~57세가 되면 급여가 단계적으로 급감하고, 단순 업무나 아예 주어진 업무가 없어 직장내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은행원이 임금피크제를 기피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데는 급여와 함께 자존감 문제가 크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이 지난해 11월 말 발표한 '금융노동자 임금피크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제도 수용도가 낮은 이유로 '희망퇴직을 통한 퇴직금 수령보다 남은 기간 급여가 적어 손해를 본다'는 응답이 48.2%로 가장 많았다. 이어서 '임피 기간 동안 수행하는 업무가 능력을 발휘하는 데 어렵거나 적극적 업무수행이 힘들다'(19.8%)거나 '조직내 불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등 자존감의 하락'(18.7%) 등이 뒤를 이었다.

당시 조사를 맡았던 정혜윤 국회 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조사 과정에서 수년간 하지 않던 창구업무를 시킨다든지 아예 하는 일이 없어 후배들에게 보이는 모습에 대해 가장 어려워 했던 것 같다"면서 "금융권 뿐만 아니라 다른 업종도 임피제 관련 조사를 했었는데 급여 삭감과 함께 직장내 자존감 상실 등이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됐다"고 말했다.

정 부연구위원은 "국책은행은 조기퇴직에 따른 희망퇴직금이 턱없이 부족해 대부분 임금피크제를 수용하고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며 "시중은행은 희망퇴직으로 먼저 나간 선배들이 '나가면 더 팍팍하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라'라고 조언해 임금이 크게 깎여도 남아 있는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국책은행 한 직원은 "영업점 출납 등의 업무로도 발령을 내는데 안하던 일이라서 실수를 하면 후배들 앞에서 굴욕적이고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며 "임금피크제가 마치 '당신도 안나가면 저렇게 되니까 나가라'라는 식으로 변질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사측이나 지점장 등 관리자들이 보는 불만도 있다. 임금피크에 들어가기 수년 전부터 이미 직장내 근무태도 등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는 직원도 상당하다는 지적이다. 시중은행 한 지점장은 "승진을 포기한 일부 고참 직원들은 영업점 안에서 실적 관리도 안되고 직장내 분위기만 흐리는 경우도 많다"면서 "지점장보다 임금이 많은 고참도 있는데 이런 직원을 생각하면 임금을 더 깎든지 아예 더 일찍 내보내는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노동부의 2019년 '사업체노동력조사'에 따르면, 금융 및 보험업 사업체의 63.6%가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있어 전산업 평균(20.9%)에 비해 크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윤두현 국민의힘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4대 시중은행의 임피제 적용자는 모두 720여명 수준이다. KB국민은행이 전체 직원의 2.3%로 가장 많고, 우리은행(2.1%)과 신한은행(0.1%), 하나은행(0.1%) 순으로 집계됐다.

KB국민은행 노조는 최근 "현재 임금피크제를 적용받는 340여명 가운데 여전히 창구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인원이 133명 정도"라며 "이중 30~40% 정도는 임금피크제 전과 동일한 업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돼 소송을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시중은행처럼 남은 정년 기간의 임금을 사실상 전부 보전해주는 희망퇴직제도가 없는 국책은행은 임금피크제를 적용받는 인원이 훨씬 많다. 산업은행이 전체 직원의 8.9%로 가장 많고, 기업은행(7.1%)과 수출입은행(3.3%) 순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앞서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조사에서는 임금피크제 개선의 방향으로 '임금 지급율 인상'이 27.4%로 가장 높았다. 이어서 '적합한 업무로 개선'(26.5%)과 '희망퇴직금 인상으로 퇴직 유도'(20.4%), '임금피크제 시작 연령의 연장'(19.3%) 등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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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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