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1979년 4월 1일 친미 이란왕정이 반미 이슬람공화정으로 바뀌었다. 냉전시대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친미 쌍둥이 기둥을 이루며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중동에서 원활하게 작동하는 데 일조하던 이란이 무너진 것이다. 소련은 같은해 12월 24일 친소 사회주의정권을 굳건히 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순식간에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반미세력이 똬리를 틀었다.

1950년대 초반까지 미국은 자국 생산 원유로 에너지 수요를 충족할 수 있었지만, 1950년 중반부터는 급증하는 수요 때문에 에너지를 대량 수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에너지 수입원은 바로 페르시아만 지역이다. 그런데 이란의 정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에너지 공급처인 페르시아만 지역안보에 비상이 걸렸다.

1980년 1월 23일 미국 카터 대통령은 새해 국정연설에서 페르시아만 지역 수호 의지를 천명했다. "만일 외부세력이 페르시아만 지역을 장악하려고 시도한다면, 이를 우리 미국의 사활적인 국익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해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써서 물리칠 것입니다." 이른바 '카터독트린'(Carter Doctrine)이다.

카터 이래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관계없이 모든 대통령은 카터독트린을 지켰다. 아프가니스탄까지 진출한 소련은 페르시아만 지역으로 내려오지 않았고, 1980년부터 1988년까지 8년 동안 이어진 이란-이라크전쟁에서 이란은 친미 국가의 유조선을 공격하며 페르시아만 지역 원유 수급을 불안한 상황으로 몰고가려 했지만, 미국의 강력한 제지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은 페르시아만 지역 에너지 유통망의 안전을 책임지며 자유주의 국제질서 수호의 맏형 역할을 자임했다.

미국 홀대에 친미 국가들 배신감 토로

그러나 카터독트린은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앞세운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 막을 내렸다. 셰일혁명으로 미국은 2011년 세계 최대 가스생산국, 2018년 세계 최대 원유생산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2019년 세계 최대 원유수출국 자리까지 차지했다. 트럼프는 2019년 친이란 예멘의 후시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시설을 공격해도, 이란이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도발을 감행해도 '미국의 국익과는 무관하다'며 동맹국 보호에 나서지 않았다.

40여년 동고동락하던 친구가 위험에 처한 나를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당연히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이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강력한 친미 아랍 왕정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느끼는 감정이다.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 당시 페르시아만 지역 친미 아랍왕정국가들이 혐오하는 이란과 핵협상을 체결하고 경제제재를 풀었다. 또 시리아 내전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 결과 친이란 바샤르정권을 무너뜨리려던 친미 아랍국들에게 절망감을 선사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춤하던 오바마에 더해 자신만 생각할 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까지 모두 계산서에 담아 흔드는 트럼프의 아집에 중동의 친미 국가들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2000년 미국의 중동산 원유수입량은 하루 240만배럴이었는데, 2021년에는 69만배럴에 그쳤다. 2021년 중동산 원유수입량은 8%이고 이 가운데 절대 우방으로 자리매김해온 사우디에서 수입하는 양은 5%뿐이다.

전 나토(NATO) 사령관 클라크 예비역 4성 장군은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일에 아무도 개입하려고 하지 않는 비정한 현실에 빗대 "석유 없는 중동은 아프리카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석유가 있으니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다. 미국의 대중동 정책 목표는 이스라엘의 안보와 함께 안정적인 석유공급이었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여유를 부린 것도 셰일혁명으로 굳이 중동에 관심을 쏟아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급격하게 치고 올라오는 중국에 관심을 쏟는 중이다. 미국 대비 중국의 GDP는 1990년 6%, 2000년 12%, 2010년 40%에 달하더니 급기야 2020년에는 70%, 2021년에는 80%까지 따라붙었다. 이러한 추세라면 2025년에 중국이 미국을 앞지를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은 모든 동맹국들과 함께 중국봉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예전처럼 중동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다.

미국심기 고려 않고 중국과 거래선 넓혀

더욱이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이 미국에서 활동하던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까슈끄지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비난하면서 사우디를 '인권 불량국가'라고 불렀다. 바이든은 대통령에 취임하고도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가가 급등하자 석유증산을 요청하고자 무함마드 빈 살만과 아랍에미리트의 왕세제 무함마드 빈 자이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과거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재균형'(rebalancing)이라는 말로 중동정책을 조정하고 있는 미국은 "중동을 떠날 계획이 없다"며 역내 친미 국가의 마음을 달래려 하지만, 전통적인 친미국가들은 이미 미국의 마음이 떠났다고 믿고 살길을 찾아나섰다. 미국의 심기는 고려하지 않은 채,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과 무기거래를 시도하고, 원유 수출대금 결제도 중국의 위안화로 할 계획이라는 얘기를 흘렸다. 아랍에미리트는 화웨이의 5G를 채택해 미국과 신경전을 벌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크라이나전쟁은 미국을 믿을 수 없는 나라로 여기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을 거면서 우크라이나가 계속 러시아를 도발하는 것을 부추기며 즐기다가, 막상 침공을 당하자 한걸음 뒤로 물러서 말로만 돕는 척하는 미국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시리아 내전에서의 미국의 우유부단함과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진격을 보면서 초강대국 미국의 일극 체제가 무너졌음을 체감하고 있는 중동의 친미국들은 이제 미국과 거리를 두고 있다. 중동을 떠날 미국에 의존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길을 찾고자 부지런히 움직이는 중이다.

이제는 미국이 중동 말 들어야 할 때

이러한 상황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7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다. 살인자 왕세자의 나라, 불량국가 사우디아라비아에 가는 이유는 묻지 않아도 뻔하다. 유가 하락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증산을 요청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그리고 중국과 협력하지 말라고 당부할 것이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증산으로 유가를 잡는 것은 일시적인 방책일 뿐 궁극적인 대책이 아니라면서 오히려 미국과 캐나다간 송유관 연결사업인 키스톤 파이프라인 건설 재개가 더 효과적이라고 조언하고 나섰다. 또 현지 전문가는 예전에는 미국이 말을 하면 다 들어줬지만, 이제는 다르다면서, 미국이 중동의 말을 들어야 할 시대로 바뀌었다고 현 상황을 평가한다.

2020년 미국의 중재로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이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국교를 정상화했고, 수단과 모로코도 이에 가담했다. 이들 국가는 '미국이 다리를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역내국가 간 협력이 강화되면 미국의 입지가 갈수록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제 중동에서 미국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새로운 중동에서는 중국도 러시아도 예전 미국처럼 군림하지 못하고 그냥 공존의 대상으로 연결될 뿐이라 한다. 미중 갈등의 파열음이 갈수록 커지는 아시아·태평양에 거주하는 중동 전문가로서 중동의 변화가 부럽기까지 하다. 일극도 다극도 아닌 초연결 시대! 중동에 화엄의 세계가 열리고 있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