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

불멸의 지도자 호치민에 관해 못다한 이야기가 있어 잠깐만 끝맺음을 하고 오늘의 주인공 수카르노로 이어갈까 한다. 그것은 호치민이 후대에 남긴 유산에 관한 것이다.

호치민의 가장 큰 치적은 베트남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이끈 역사적 영웅이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호치민의 리더십은 그가 생전에 이룬 치적 못지않게 장차 통일베트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는 의미가 더 크다.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난 많은 신생국들이 탈식민화의 해방감과 독립의 기운에 도취돼 배타적인 민족주의, 폐쇄적인 자력갱생주의, 비실용적인 사회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에 반해, 베트남은 1975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서방국가들과의 구원을 씻고 관계를 복원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 시장경제를 향한 개혁과 개방에 박차를 가했다.

베트남이 수천년 동안 중국의 지배와 침략, 괴롭힘을 받아 국민들 사이에는 반중정서가 퍼져있지만 지도자들이나 엘리트들이 노골적으로 반중외교를 펼치거나 반중시위를 선동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수백만명의 베트남인들이 목숨을 빼앗겼지만, 화해와 수교를 위해 먼저 손을 내민 쪽은 놀랍게도 베트남이었다.

도이모이(쇄신) 표방 이후에는 동아시아와 서구의 자본 투자와 기업 진출을 쌍수 들어 환영하고 있다. 미국과 자본주의의 실체를 꿰뚫어보고 세계사의 흐름을 읽어낸 호치민의 냉철한 실용주의와 글로벌한 시야가 통일베트남의 외교적 좌표가 된 덕분일 것이다.

호치민이 남긴 또 하나의 위대한 유산은 혁명과 통일 이후 이루어 낸 국민통합이다. 물론 호치민 자신은 통일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통일 후에도 남북 베트남 간의 격차와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두가지 정치적 격변을 겪은 나라치고는 희생이 최소한에 머물렀다.

호치민의 후계자들은 전쟁 와중에 베트남을 버리고 떠난 친남베트남 인사들의 귀국과 투자까지 환영했다. 이념보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항상 앞세우는 후대의 지도자들도 호치민을 꼭 닮았다.

인도네시아라는 민족 만든 지도자

호치민에 미치지는 못해도 국민들의 추앙과 사랑을 많이 받은 지도자는 인도네시아의 국부 수카르노다. 수카르노는 독립과 건국을 이끈 현대 인도네시아의 최고 영웅으로, 20년(1947~1966) 동안 대통령 자리를 지켰다. 수카르노는 대통령으로서 권력 행사나 지도자로서 실질적으로 이룩한 업적보다 자신의 이력 행동거지 언변 캐치프레이즈 상징성을 통해 국민들에게 훨씬 더 강한 영향을 끼친 지도자다.

호치민이 베트남민족에게 독립국가를 선사했다면, 수카르노는 수백의 종족들을 하나로 통합해 인도네시아라는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수카르노의 이름 뒤에는 항상 세가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독립선언의 아버지' '인도네시아의 첫 대통령' '민족창건의 아버지'가 그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종족 언어 종교의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다문화사회다. 수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인도네시아는 250여개의 언어, 1300개가 넘는 종족, 1만750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종교도 복잡하다, 모든 세계종교와 다양한 분파들, 전통종교와 토속신앙까지 따지면 세계4대 인구대국 인도네시아는 종교대국이기도 하다. 이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어낸 많은 요인들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수카르노의 리더십이다.

수카르노는 신생국이던 인도네시아를 세계 만방에 알리고, 국민의 가슴 속에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와 민족의 이름을 깊이 각인시켰다. 네덜란드와는 독립전쟁과 파푸아 수복 전쟁을 벌이고, 영국에게는 말레이시아 독립을 반대하는 선전포고를 하고, 미국을 향해 신제국주의자라고 공격을 한 것은 전쟁의 실질적인 결과보다 국민들에게 '대국 인도네시아'의 이미지를 심어준 상징적 효과가 더 컸다.

1955년 네루 저우언라이 나세르 등 쟁쟁한 제3세계 지도자들을 '비동맹의 발상지' 인도네시아로 불러들이면서 수카르노는 세계적인 리더로서의 면모를 여지없이 과시했다.

'나사콤'으로 대변되는 통합 열망

수카르노는 탁월한 웅변가였다. 화려한 수사력과 다채로운 어휘 구사, 빠른 어조와 카랑카랑한 음성은 그의 연설을 듣는 청중들과 라디오 시청자들을 항상 뜨거운 열기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반제반식민, 반영반미를 외칠 때 국민들은 건국 10여년밖에 안된 인도네시아가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오른 듯 환상적인 착각과 희열을 느꼈다. 아직도 자카르타 거리에는 60년 전 수카르노의 연설을 틀어 놓고 씨디와 테이프를 파는 노점상을 볼 수 있다.

수카르노는 수려한 웅변가였을 뿐 아니라 언어의 귀재이자 마법사였다. 그의 연설에는 항상 10여가지의 외국어와 인도네시아 방언들이 적재적소에 가미된 문장 어구 단어들이 현란하게 등장한다.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만 해도 네덜란드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가 있었고, 아랍어 일본어까지 깨쳤다. 자와어 순다어 발리어 인도네시아어 등 지방어는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습득한 모국어였다. 그의 연설 속에는 심지어 러시아어 이태리어 라틴어까지 등장한다. 외국생활을 한 적이 없는 수카르노의 외국어 구사는 경이롭기 짝이 없다.

다양한 언어들을 동원해 하나의 연설문을 작성했듯 수카르노는 여러 종족을 합해 하나의 민족을 만들고, 여러 이념 사상 종교를 '합성'해 자신의 '국정이념'을 만들었다. 자와인들의 신념체계를 지탱하는 혼합주의(syncretism)는 수카르노의 입과 머리를 통해 구현되었다.

그의 통합능력은 자신의 이념체계로 볼 수 있는 '나사콤'(Nasakom, 민족주의 이슬람 공산주의의 두문자어)이라는 신조어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통합은 고사하고 서로 공존하기조차 힘든 민족주의와 이슬람, 공산주의 세 이념과 종교를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사실 무모하고 순진한 시도였다. 국민통합에 온통 정신이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 세가지는 당시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사고 신념체계이자, 세속엘리트와 무슬림, 농민 등 세 계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간의 조화와 균형은 수카르노가 좌경화하면서 깨지고 말았다. 1966년 수하르토의 쿠데타로 실권을 빼앗긴 뒤 4년간 사실상 감금생활을 하다가 7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정책 실패, 개인적 결함에도 존경받아

수카르노는 국민에게 인도네시아인으로서 자부심을 심어주고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와 민족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상징을 넘어 실질적인 정책으로 치환해내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나이브하고 낭만적인 생각에서 추진된 나사콤이나 사회주의, 경제민족주의의 이념과 정책은 완전한 실패였다. 미국과 서방국가들과 척을 지고 중국과 소련을 가까이한 것은 결정적인 패착이 되었다.

수카르노는 개인적인 약점도 많은 지도자였다. 무려 아홉번 결혼하고 다섯번 이혼했는데, 그중에는 자기가 스무살 때 결혼한 정치적 스승의 딸, 열세살 연상 유부녀인 하숙집 여주인을 이혼시키고 결혼했던 부인, 마흔살 연하의 일본인 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베트남으로 돌아온 후 평생 독신으로 산 호치민과 너무 대비되는 삶이었다.

인도네시아 정치를 격변으로 몰아넣고 국정을 파국으로 이끌었으며 스캔들로 얼룩진 결혼생활을 영위했지만, 국민들은 수카르노를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민족을 만들었고, 그 대가로 국민들은 그의 허물을 덮어주고 영웅으로 만들었다. 과보다 공을 중시해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의 지혜롭고 균형잡힌 역사관은 평가받을 만하다.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