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

1851년 12월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가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3년 전 선거를 통해 차지한 단임제 대통령직을 벗어 던지고 독재자로 등극하자, 칼 마르크스는 그동안 너무 자주 인용되어 이제는 진부하게 들리는 유명한 경구를 날렸다. "역사는 반복된다. 첫번째는 비극으로, 두번째는 코미디(farce)로."

올해 6월 30일 필리핀에서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2세(닉네임 '봉봉')가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소박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만약 마르크스가 살아서 이 무대를 목격했더라면, 170년 전 프랑스에서 삼촌과 조카 사이에 벌어진 것보다 36년에 걸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벌어진 이 역사의 반복이야말로 훨씬 더 자신의 경구에 적합한 사례라고 무릎을 치지 않았을까.

마르코스 가문에 의해 망가진 민주주의

아버지 마르코스는 1965년부터 1986년까지 무려 21년 동안 필리핀을 총체적으로 유린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아 민주주의의 '진열장'(showcase)로 불리며 개발도상국의 모범으로 꼽히던 필리핀은 마르코스 독재가 '핥고' 지나간 21년 동안 정치는 헌정중단과 부정선거 테러와 폭력 내전으로 난장판이 되고, 경제는 부정부패 불황 절대빈곤 외채의 수렁으로 빠져 들었으며, 사회는 이념과 종교적 갈등으로 첨예하게 분열했다. 1986년 시민봉기와 집권층 내분, 미국의 압력으로 마르코스가 쫓겨났을 때, 필리핀의 위기 모순 갈등은 너무나 깊어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보였다.

민주화 이후 필리핀의 선거민주주의는 중단없이 이어졌지만 필리핀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인 빈부격차, 과두제적 엘리트정치, 부정부패, 반인권적 정치문화 등은 여전히 필리핀의 선진화를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필리핀 정치인들이 이런 문제에 매달리는 동안 마르코스 시대의 비극은 점차 잊혀지고, 명예회복과 복수를 꿈꾸어 온 가족, 특히 탐욕과 사치의 상징이었던 부인 이멜다와 아들 봉봉이 각색한 희극은 역사를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다. 결국 5월 9일 봉봉은 인권변호사 출신이자 현직(당시) 부통령인 레니 로브레도를 무려 30%p 이상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주화 이후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마르코스 독재는 인근 아시아 국가들이 경험한 독재정치와는 정도와 차원을 달리한다. 1972년 필리핀의 민주정치를 중단시킨 계엄령과 이듬해의 개헌은 독립 이전부터 지속되어온 민주주의를 종식시켰다. 선거를 없애고 국회 활동도 제한한 계엄령을 무려 9년간 유지했다. 비록 과거의 민주주의가 토지소유 가문과 엘리트가 주도하는 과두제적 성격을 띠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정당정치와 자유선거 정권교체를 보장하고 있었다.

마르코스는 1회로 제한된 중임규정을 없애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고,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해 폭력을 조장하고 조작했으며, 무질서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농민, 무슬림, 진보적 지식인들을 탄압했다. 국제앰네스티는 마르코스 치하에서 무려 7만명이 정치범으로 투옥되고, 3만4000명이 고문을 당했으며, 3200여명이 군인과 경찰의 총칼에 희생되었다고 보고했다. 그중에는 토막살인한 시신을 저잣거리에 전시한 이른바 '야만적 살인'(salvaging) 1473건도 포함된다.

젊은층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봉봉 지지자들은 '비록 마르코스가 독재를 하긴 했지만 경제성장에는 크게 성공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주장과 믿음은 통계나 연구결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마르코스 집권 21년 가운데 경제성장률이 높았던 시기는 1~2차 석유파동 사이 기간인 1972~1979년이 고작이다. 평균 6%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동아시아 신흥공업국의 성장률엔 크게 못 미쳤다.

마르코스는 모든 자본을 외국에서 끌어 들여 과시적인 인프라 구축과 수입대체 산업화에 투입했다. 미국과 세계은행은 반공국가를 방어한답시고 90억달러가 넘는 원조를 했다. 1981년 계엄령이 해제되고 마르코스가 하야할 때까지 5년 남짓 기간 필리핀 경제는 최악의 기록을 남겼다. 2년 동안 마이너스 7.3% 역성장을 했고, 실업률은 11.1%로 두배로 증가했으며, 절대빈곤률은 50%에 육박할 정도로 처참했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와 달리, 마르코스 치하의 필리핀엔 개발은 없고 독재만 있었다.

세계 독재사에 유래 찾기 힘든 마르코스

리더십 연구는 지도자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절대적인 잣대로 삼지 않는다. 즉 아무리 무능하고 사악한 지도자라도 지도자로 보는 것이다. 포악한 독재정치를 하고 무능한 경제정책을 편 지도자들은 많지만 마르코스만큼 부정축재를 하고 천문학적 수준의 국부를 외국으로 빼돌린 지도자는 없었다. 마르코스 밑에서 산업부장관을 지냈던 사람조차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하르토가 횡령 착복한 돈이 더 많을지는 모르지만 대부분 국내에서 사용되거나 투자된 데 반해, 마르코스는 착복한 모든 돈과 재산을 몽땅 외국으로 유출했기 때문에 나라에 미친 해악이 훨씬 크다"고 말할 정도였다.

마르코스 가족은 1986년 2월 25일 헬리콥터로 대통령궁을 탈출하는 와중에도 7억1700만달러의 현금을 22개의 상자에 나눠 담고, 보석 413점과 금괴 24개 등 1500만달러어치의 보석을 챙겼다. 이는 고스란히 미국이 제공한 공군기에 실려 하와이로 옮겨졌다.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가 말라카냥궁에 남겨둔 3000켤레의 신발은 전세계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1986년 초 취임하자마자 마르코스가족이 세계 곳곳에 숨겨 놓은 재산을 되찾기 위해 특별위원회(PCGC)를 설치했다. 주로 예금과 부동산의 형태로 타인의 명의를 빌려 은닉한 재산 가치는 최소 50억달러에서 최고 100억달러로 파악됐다. 현재 가치의 한화로 계산하면 15조~30조원에 이른다.

PCGC에 따르면 현재까지 36년 동안 노력해 되찾은 재산은 절반에 불과해 앞으로도 최소 7년은 더 활동해야 한다. 하지만 봉봉 대통령이 위원들을 교체하거나 활동을 중단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한다. 봉봉과 이멜다는 지금까지 횡령과 은닉사실을 인정하거나 수사와 재판에 협조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오히려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마르코스의 행적과 재산 형성에 관한 가짜뉴스를 적극 생산해 끈질기게 확산시키고 있다.

반복된 두번째 역사도 비극으로 끝날까

마르코스가족이 1991년 망명생활을 끝내고 필리핀으로 돌아온 이후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 마르코스에 대한 가짜 뉴스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마르코스 브랜드를 복원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끈기있게 수행'하는 일이었다.

봉봉은 2009년 상원의원에 당선돼 중앙정치무대로 진출하면서 정치커뮤니케이션 수단과 인구 구성의 변화에 주목했다. 지난 선거에서 40대 미만의 유권자는 전체의 56%를 차지했고, 이들의 72%가 봉봉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필리핀의 SNS 이용률은 전세계 최고 수준으로 틱톡 이용자는 3600만명, 페이스북은 무려 8400만명에 이른다.

봉봉은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바로 이 젊은세대를 주된 타깃으로 삼았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특히 짧은 동영상을 매개로 한 틱톡 등 SNS를 플랫폼으로 삼아 마르코스 시대를 '경제발전과 정치안정이 충만했던 시대'로 재구성했다. 또 엘리트주의와 기득권에 매몰된 자유주의적(liberal) 정치인 언론인 학자 등 구세대가 자신과 가족을 '희생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집권 초기 수천명의 마약범죄 의심자들을 법적 절차 없이 처형했음에도 임기 말까지 80%가 넘는 지지율을 유지한 두테르테 대통령, 그의 딸 사라 부통령 후보와 연대한 것도 봉봉의 당선을 도왔다. 반복된 두번째 역사도 비극으로 끝날까 염려된다.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