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휘 이화여대 국제정치학 교수

올 한해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한 말 중 하나는 '국제질서 대전환'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7세기 말~18세기 초를 전후로 근대 국제질서가 시작됐다. 중국의 풍부한 1차산업 능력과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와 산업화는 유럽에서 먼저 시작됐다. 유럽은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시장경쟁을 꽃피웠고 결과적으로 근대 국제질서의 시발점이 됐다.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파시즘 공산주의와 같은 국제사회 통합의 큰 장애물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발전 자체가 낳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자정(自淨) 노력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대체로 하나의 거대한 지구촌을 지향하는 일관된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노력의 정점에 지난 30년 동안의 '세계화'가 자리잡고 있다. 냉전 종식과 함께 인종 민족 종교 자원, 심지어 능력 등 여러 요인들에 의해 개인과 집단은 갈기갈기 나뉘어졌지만 동시에 세계화 시간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더 가까워졌다. 시장이 더 많은 상품과 방문자를 수용하면서 과거에는 예상치 못했던 대규모 정보 교환과 사회문화 교류가 일상화됐다.

세계화의 혜택이 차별적으로 분배된다는 염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시장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2022년을 관통한 '강대국 이기주의'

그런데 2022년은 그 어느 해보다 국제질서 위기를 경고하는 주장이 빈번히 제기됐다. 세계화 30년 경험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구조조정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러한 목소리는 2023년부터 예상되는 '포스트 코로나' 질서 논쟁과 맞물려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국제질서 균열의 대표적인 사례들과 맞물리고 있다. 지난 2월 말 시작된 우크라이나전쟁이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고, 시진핑 주석의 3연임 결정은 대만 문제를 포함한 미중갈등 국면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한 국가들 간 쟁탈전도 격화됐다.

올해를 장식했던 핵심적인 사건의 한가운데에는 '강대국 이기주의'가 위치한다. 바이든행정부가 중간선거에서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는 바이든 버전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지난 8월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기업들에 대한 차별적인 혜택을 합법화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승인했다. 과거 세계무역기구(WTO) 질서를 소중하게 떠받들던 미국 입장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결정이다.

독일과 중국의 밀착도 놀랄 만한 사건이다. 독일은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화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을 제공했고, 우크라이나전쟁을 계기로 국제 외교무대에서 의도하지 않은 고립을 자초하는 입장에서 전략적으로 중국에 손을 내밀었다. 10월 20차 공산당 당대회에서 장기집권에 성공했지만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비판에 직면한 시진핑 주석으로선 독일이 내미는 손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글로벌 에너지 시장은 가히 춘추전국시대다. 러시아를 압박하기 위한 미국 주도의 글로벌 에너지 동맹에 균열이 생겼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인도는 이러한 균열을 이용해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여념이 없다.

전통적으로 인도는 국제무대의 여백을 적극 활용하는 외교전략으로 존재감을 과시해왔다. 그런데 미중충돌과 중러연대, 그리고 다자질서의 변화로 인해 이제는 인도 스스로 강대국 정치의 전범(典範) 하나를 제시해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맞닥뜨리게 됐다.

특히 거의 모든 관점에서 중국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인도의 국가이익과 외교전략을 고려할 때 향후 인도가 발신할 국제정치적 메시지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사우디 쪽은 상황이 좀 더 심각하다. 2차세계대전 이후 정착돼 지금까지 작동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 사우디는 언제나 중심에 있는 듯하면서도 아웃사이더였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하에서는 단위 국가의 투명성과 민주주의를 전제 조건으로 요구했지만,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는 미국으로부터 항상 예외적이면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아왔다.

세계화 이후 시장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지만 에너지 문제, 대테러전쟁, 미국의 외교자원 고갈, 중동 국가들 내 갈등 등으로 사우디의 예외성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제 글로벌 에너지 전쟁의 본격화로 사우디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이 분명하다. 중국과 러시아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힘과 자원만 있으면 비민주성을 용인받는 사례가 늘어날 수 있다.

북한, 글로벌 혼돈을 자국 이익 극대화로

한반도 문제로 관점을 옮겨보면, 국제질서 대전환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북한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지금 북한은 글로벌 혼돈을 자국의 이익 극대화 기회로 활용하려는 의지를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표방하고 있다.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위해 쏟았던 에너지는, 구조화되기 시작한 미중갈등 국면과 깊게 연동되어 있다.

올 한해 북한은 30회가 훨씬 넘는 탄도 미사일 실험을 감행했다. 국제질서 대전환의 시기가 자국의 생존 공간을 극대화해 줄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지난 9월 발표한 '핵무력법제화'를 통해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행위자 모두에게 안보 우려를 전파하고 있다.

북한은 중러 연대, 미중 충돌, 대만 위기, 일본의 군사주의 등의 상황을 자국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전제로 믿을 것이다. 과거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국제질서 혼돈을 일탈행위의 정당화 근거로 삼으려는 북한의 전략은 대체로 들어맞았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종언은 아직 일러

2022년 한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결국 세계화는 후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 효율을 극대화한 생산에만 초점을 맞춘 세계 '생산 공급망'(supply chain)의 과도한 밀집 현상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순식간에 전세계 구석구석으로 전달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나마 코로나는 '발생→가시화→문제화→확산 및 악화' 등으로 이어지며 단계별 분석과 판단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초연결 시대에 복잡성과 상호연계성이 증폭된 신안보위협은 국제사회 수면 아래 잠복해 있다가 특정 시점에 돌이킬 수 없는 문제로 등장할 수 있다. 이 경우 인류는 또 다시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될 것이다. 코로나 사태 '진원지 논쟁'에서 보듯 향후 인류 앞에 새로운 유형의 위협이 닥쳤을 때 정보왜곡과 책임회피를 위한 거짓논리가 심각한 수준에 이를 수도 있다.

국제질서 대전환이 도래하고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종말의 순간을 맞이할 것인가? 많은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심각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질서를 대체할 다른 국제질서의 유형이 자리잡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탱한 핵심 축인 '투명하고 민주적인 단위 국가' '국가들 간 제도적 관계' '다자주의적 문제 해결'이라는 3개 원칙이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정국면에 돌입할 가능성은 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위기로 인해 국제사회 자체가 일종의 '재사회화'(re-socialization)를 경험할 수는 있겠지만 자유주의 개방성 호혜주의에 바탕을 둔 다자주의 정신을 대체할 원칙이 등장하려면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2023년 이후 맞이하게 될 소위 '세계화 2.0'의 공간에서 국가들의 힘과 영향력은 더욱 다양해지고 차별화될 것이다. 30년 전 세계화가 약속했던 많은 장밋빛 약속, 인류 모두의 번영과 평화 같은 구호들이 다시 한번 모두의 고민으로 자리잡기를 희망한다.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