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중간 점검 이유로 변경 … 정부의 개혁 후퇴 메시지

상장기업 전체 적용 후 효과 확인하려면 최소 9년 유지 필요

회계투명성 향상 연구결과 잇따라 … "제도 완화 명분 약해"

기업과 회계법인의 유착을 막고 외부감사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시행된 회계개혁이 뿌리부터 흔들리면서 좌초 위기를 맞게 됐다.


금융당국이 회계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제도인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6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기업이 감사인(회계법인)을 6년간 자유 선임했다면 이후 3년은 금융당국이 감사인을 지정하는 '주기적 지정제'의 소위 '6+3' 방식을 '9+3' 또는 '6+2' 등으로 변경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9월 금융위는 '회계개혁 평가·개선 추진단'을 구성한 후 제도개선을 논의해왔다. 기업과 회계업계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사실상 회계개혁으로 도입된 각종 제도들로 인한 기업 부담 완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전 방위적인 규제 개혁 움직임이 커지면서 기업들은 회계투명성 향상을 위해 도입된 제도들마저 "폐지해야 할 규제"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기업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부도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자산 1000억원 미만 상장사에 대해 '내부회계관리제도 외부감사'를 면제한 게 대표적이다. 회계개혁 이후 상장사의 내부회계관리제도 인증 수준은 '검토'에서 '감사'로 강화됐다. 최근 잇따라 드러난 기업들의 횡령 사건의 경우 내부회계관리제도 강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미 존재했던 횡령이 내부회계관리제도 강화로 적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중소 상장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내부회계관리'라는 감시망을 약화시키는 것은 오히려 자본시장에서 재무보고의 신뢰를 떨어뜨려서 자본조달 비용을 상승시킬 경우 기업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될 수 있다.

금융당국은 또 상장회사 수준의 회계 규제를 적용받는 대형 비상장회사의 기준을 현행 자산 1000억원 이상 기업에서 내년부터는 자산 5000억원 이상 기업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현재 자산 1000억원 이상 5000억원 미만인 비상장사는 그동안 적용받았던 일부 회계 규정이 면제된다.

◆힘겹게 도출된 사회적 합의, 손쉽게 무너지나 = 2018년 단행된 회계개혁의 중심 축인 '주기적 지정제와 표준감사시간제, 내부회계관리제도' 등은 사회적 격론 끝에 힘겹게 도입됐다. 특히 주기적 지정제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조치로 일종의 '극약 처방'이다.

기업의 회계부정을 감시해야 할 외부감사인(회계법인)이 감사계약 체결을 위해 기업의 눈치를 보거나 오랜 기간 기업과 유착될 경우 제대로 된 감사가 이뤄질 수 없다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건으로 논의가 촉발됐고 기업의 회계투명성 향상과 자본시장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국회에서 '6+3'으로 결정했다. 당시에도 '9+3'이 제시됐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견회계법인의 한 대표회계사는 "기업과 회계법인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결정해온 감사계약을 정부가 개입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논란이 거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효익이 훨씬 크다는 공감대가 있어서 법이 만들어 진 것"이라며 "이 같은 사회적 합의를 뒤집으려면 결정적인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단지 기업들의 감사보수가 올랐다고 해서 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제도 완화이 명분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의 회계개혁이 후퇴할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될 것"이라며 "기업들한테는 회계 규제가 점차 점점 완화될 것이라는 시그널"이라고 말했다.

김범준 가톨릭대 회계학과 교수도 "외부감사인을 선임할 때 감사인선임위원회가 매우 독립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면 굳이 금융당국(증권선물위원회)이 감사인을 선임하는 주기적 지정제가 필요 없을 것"이라며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주기적 지정제라는 인공호흡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도 효과 알기도 전에 완화 = 주기적 지정제 시행 이후 기업의 회계투명성이 향상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잇따라 나왔다. 주로 제도 시행 2~3년차에 나온 자료들이다.

주기적 지정기업은 직권 지정 또는 자유 선임으로 감사인을 변경한 기업에 비해 재량적 발생액(경영자의 재량에 따라 기업이 이익을 달리 측정)이 감소했다는 연구결과를 비롯해 △감사인 협상력 제고 △감사의견 구매 목적 감사인 교체 감소 △감사보수·감사시간 증가에 따른 감사노력 확대 등 다양한 효과들이 제시됐다.

주기적 지정제를 통해 감사인 교체를 앞두고 있는 기업의 경우 기존 감사인도 협상력이 강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인이 교체될 경우 부실 감사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감사를 강화하려고 하고, 이는 감사보수 협상에서 협상력 강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기업의 경우도 주기적 지정으로 감사인 교체가 예상되는 경우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감사의견을 구매하려는 목적의 감사인 교체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연말에는 그동안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는 기업의 감사 전 재무제표를 비교해 주기적 지정제의 효과를 검증한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주기적 지정제 대상이 된 기업들은 감사인을 지정받기 직전 연도에 '5% 이상 당기순이익 감사조정'을 한 비율이 50% 이상으로 나타나 20~30%대에 머물렀던 과거와 달리 큰 폭으로 상승했다.

'5% 이상 당기순이익 감사조정'은 이전에 작성된 재무제표가 적절하지 않아서 감사의견을 바꿀 정도의 수준이라는 의미로, 외부감사인이 기업의 재무제표를 더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검증했다는 것을 뜻한다.

대다수 연구는 이처럼 주기적 지정을 받기 이전과 이후의 기업의 외부감사를 비교한 것이다. 주기적 지정을 3년간 받고 다시 자유 선임으로 전환한 기업들과 관련된 연구는 없다. 첫 지정을 받은 기업들이 3년을 마치고 자유 선임으로 전환한 첫 해가 올해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제도를 시행한고 한 싸이클(6+3)을 거친 다음에 성과평가를 통해 제도 개편을 논의하는 게 맞다"며 "정권이 바뀌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는 캐치프레이즈가 회계분야까지 도미노로 내려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경제 관료 출신의 한 회계사는 "금융당국이 정책 효과를 고려해 가장 적합한 제도를 찾아야지, 기업 반발이 크다고 해서 기존 제도 완화해서 타협하는 식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주기적 지정제의 틀에 변화를 주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지적했다.

["기업 반발에 후퇴하는 회계개혁" 연재기사]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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