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 조사위 대국민보고

의도적 발포 재확인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최소 20곳 이상에서 50여회 이상 발포한 사실이 확인됐다.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166명 가운데 135명은 총상으로 사망했으며, 총상을 입은 부상자는 최소 30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는 16일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대국민보고회를 열고 지난 3년간 조사활동에서 새롭게 확인한 내용을 공개했다.

진상규명 조사위는 우선 "광주, 전남지역의 계엄군 진압작전을 재구성하고 총상에 의한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지도상에 표기해 분석한 결과 광주와 전남 일원 최소 20곳 이상에서 50여 차례 이상 발포가 있었다"고 밝혔다.

시민을 향한 계엄군의 구체적인 총격 횟수가 국가기관 조사를 통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희생자 166명 중 135명 총상 사망 = 조사위에 따르면 계엄군의 첫 발포는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분경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시작됐다. 이어 20일 오후 11시쯤 광주역 인근에서 발포가 이뤄졌고, 21일에는 11공수여단과 7공수여단이 배치된 전남도청 일원과 3공수여단이 배치된 전남대 일원에서 총격이 있었다. 또 조선대 앞, 학동, 지원동, 송암동 등 계엄군이 배치된 대부분 작전지역에서도 발포와 그에 따른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위가 병원 진료기록과 보상심의서류를 분석한 결과 총상에 의한 사망자는 총 135명, 부상자는 최소 300명 이상으로 많은 피해자가 머리와 가슴 등 치명적 부위에 총격을 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5.18민주화운동 민간인 희생자 166명 중 80% 이상이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조사위는 특히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쯤 시위대의 화염병 투척 및 장갑차 돌진 후 이뤄진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전에 이미 일부 병력에 실탄이 분배됐다는 사실을 계엄군의 진술과 현장 사진 등으로 확인했다. 또 당시 대대장 체험수기와 1995년 검찰 진술, 현장 취재기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도청 앞 집단 발포 상황에서 공수부대가 횡대로 '앉아 쏴'와 '서서 쏴'의 자세로 동시에 여러 곳에서 사격한 사실도 확인했다. 당시 계엄군의 발포가 우발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었음을 재확인한 것이다.

조사위는 당시 장갑차 기관총 사수로부터 하루 전인 20일부터 실탄이 장착돼 있었다는 진술도 확보했다.

코브라 공격헬기에서 20mm 발칸 연습탄 사격이 이뤄진 정황도 발견했다. 조사위는 헬기 사격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 조선대학교 절토지에 대해 현장조사를 실시, 20mm 발칸 연습탄두 1개를 발견했다.

당시 501, 502항공대에서 조종사로 복무한 3명으로부터 '5.26 상무충정작전을 하루 앞두고 열린 작전회의에서 지상작전부대의 요청이 있으면 발포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는 진술과 '상무충정작전이 실패했을 경우 2차 작전으로 광주비행장에 무장헬기를 대기시키고 공수부대 잔여 병력을 헬기에 탑승시켜 타격하기 위한 작전계획이 있었다'는 진술도 확보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발포명령, 사실상 전두환 지시" = 조사위는 발포의 지휘계통과 연관된 중요인물 70여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포 명령은 문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실상 전두환의 지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발포는 보안사 계통에서 내려간 것이다"라는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 박 모씨의 진술을 확보했다. 또 육본 보안부대장 김 모 대령으로부터는 "10.26 이후 이희성은 실권이 없는 사람이었고, 참모차장 황영시가 광주 진압작전의 실질적 사령관이었는데 황영시를 움직인 사람은 전두환 사령관"이라는 진술을 받았다.

조사위는 현재까지 조사 결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발포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며 첨단 조사기법을 동원해 발포책임 소재를 명료하게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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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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