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7일 국내외 언론은 푸틴 대통령의 취임식을 ‘현대판 차르 대관식’이라 보도하며 ‘종신집권’ ‘신냉전 심화’ ‘북중러 밀착 가속화’ 등의 암울한 미래 전망을 쏟아냈다. 예상대로 보도는 피상적이었고 ‘독재’라는 한 주제에 집중했다. 5선 임기를 완주하면 과거 스탈린의 집권 기록을 넘어서고, 다시 2030년 대선에서 6선에 도전하면 18세기 예카테리나 2세의 재위 기간도 넘을 수 있다는 식의 조롱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 언론은 “왜 러시아 국민들은 푸틴을 지지하는가?” “도대체 푸틴은 러시아를 어디로 이끌고 가려는가?” 등의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너무 안이했다.

서방언론이 놓친 푸틴 취임사 핵심 발언

취임식 발언을 정밀 분석한 보도도 거의 없었다. 취임사에서 ‘독립’ ‘안보’ ‘단결’ ‘통합’ ‘국민의 이익’ ‘다극 세계 질서’ 등 익숙한 언어들을 접한 언론은 취임사를 그저 내부 결집 강화용으로 해석하거나, 오랫동안 강조되었던 단어가 단순 반복된 진부한 취임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언론은 푸틴의 발언에서 ‘세계 다수(world majority)’라는 핵심어를 놓치고 말았다.

서방의 언론은 푸틴이 취임사에서 서방과의 대화를 언급하며 “안보와 전략적 안정을 놓고 대화할 수 있지만, 대등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전제했던 발언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그러한 보도는 러시아-서방 관계를 대립구도로 배치하고, 은연중에 독자들에게 ‘고립된’ 러시아의 고집불통 지도자(독재자)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연설문 원문을 숙독하면 그림이 달라진다. 러시아에게 대서방 관계 개선은 최우선 순위도 ‘절박한’ 과제도 아니다. 푸틴은 취임사에서 먼저 “우리는 러시아를 신뢰할 수 있고 정직한 파트너로 여기는 모든 국가와 좋은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세계 다수’다”라고 발언한 뒤 서방과의 대화를 피하지는 않겠다는 원칙론을 밝혔다.

푸틴의 발언은 두가지 뜻을 함축한다. 첫째, 러시아는 고립되지 않았다. ‘세계 다수’의 국가들과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제재에 나선 서구집단이 ‘소수’이고, 오히려 러시아가 다수의 편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제재에 연연하지 않고 ‘세계 다수’를 바라보며 갈 길을 가겠다고 한 것이다. 실제로 대다수 국가들은 반서방도, 반러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실리를 좇으며 러시아와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정작 대러제재로 극심한 사회경제적 혼란과 경제침체를 겪는 국가들은 서구집단이다.

둘째, 최근 강대국들 사이에 글로벌사우스(Global South)를 견인하려는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도 이를 포괄하는 담론(‘세계 다수’)을 제시함으로써 대안적 국제질서 구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러시아는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 등의 출범을 대안적 질서 구축의 맹아로 바라보았고, 최근 브릭스플러스(BRICS PLUS)로 나타난 외연 확대는 국제질서의 다양성과 다극화를 반영하는 실질적 성취로 해석한다.

‘세계 다수’ 담론의 기원은 러시아의 외무장관·총리였던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의 대외정책 노선으로 소급된다. 그가 주창한 전방위 외교와 다극주의는 이미 러시아 대외정책의 핵심노선이 되었다. 가까이는 2022년 12월 ‘프리마코프 독회(Primakov Readings)’에서 푸틴의 외교정책보좌관인 유리 우샤코프가 했던 발언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는 유라시아 공간에 ‘정의롭고 보편적인 원칙과 접근’을 옹호하는 새로운 강력한 건설적인 힘(‘세계 다수’)이 형성되고 있다고 언급했고, 이것들이 ‘서구의 규칙 기반 질서’ 개념에 바탕을 둔 “현대적 형태의 신식민주의나 세계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아프리카 및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세계 다수’는 러시아의 대외정책 노선을 외부에 발신하는 용어로 자주 활용되기 시작했다. 또 2023년 말부터는 러시아 대외정책의 근간을 구성하는 핵심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푸틴은 2023년 11월 ‘프리마코프 독회’에 보내는 축전에서 서방국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구축한 세계화 모델은 그 유용성이 끝났다고 선언했고, ‘세계 다수’의 요구를 충족하는 새롭고 공정하며 민주적인 국제관계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다고 국제정세를 평가했다.

단순한 반서구 아닌 당사국 주권이 기준

‘세계 다수’의 범주 등에서 적잖은 오해와 혼란이 있었다. 하지만 2023년 12월 말에 ‘세계 다수와의 관계에서 러시아의 정책’이라는 제하의 문서가 발간됨으로써 일정 정도 체계적인 개념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세명의 필자가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고 그중 한 사람은 푸틴의 외교정책 책사인 세르게이 카라가노프 교수였다.

러시아에서 논의되는 ‘세계 다수’란 “미국 및 미국이 후원하는 조직과 구속력 있는 관계에 포함되지 않은 비서방 국가”를 말한다. 단순화하면 ‘세계 다수’를 결정짓는 요인은 서구의 대러 제재에 대한 각 국가들의 관계다. 하지만 ‘반서구’ 기조 자체가 ‘세계 다수’의 일원임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핵심은 당사국의 주권과 독립적인 대외정책의 여부에 있다.

저자들은 우크라이나전쟁이 세계를 양분했다는 통념에 반대한다. 서구집단이 ‘세계 다수’를 향해 마치 세계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진영으로 분열된 것처럼 몰아가지만 이것은 기만적인 프레임이라 주장한다. 오히려 국제정치 현실에서 서구집단의 국제관계가 더 권위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주장이다.

저자들은 러시아의 ‘특별군사작전’을 주권과 독립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위한 투쟁으로 해석한다. 러시아의 대외정책은 ‘특별군사작전’이 시작되면서 두개의 지평으로 분리 전개되었는데, 하나가 제재에 참여한 서구집단(197개 중 45개국)과의 ‘하이브리드 전쟁’이라면, 다른 하나는 제재에 참여하지 않은 ‘세계 다수’의 국가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그 덕분에 러시아가 고립에서 벗어나 서구집단에 성공적으로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저자들은 ‘세계 다수’가 서구집단에 대항하는 블록도 아니고, 과거 비동맹운동의 재현도 아니라고 본다. 이들은 ‘세계 다수’가 다양한 이념 문화 정치 체제를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일군의 비서구 국가들은 중국 러시아 등 비서구 중심국들과의 관계나 자신의 주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미국·EU와 협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보고서 저자들은 2040년까지 △러시아의 정신적·물질적 발전 중심을 우랄과 시베리아 전체로 신속하게 이동 △전통적·신규 파트너와의 무역 및 경제 관계 발전 △특히 BT 및 ICT 분야에서 공동 기술 프로젝트의 구현 △세계 시장 접근을 위한 새로운 물류 회랑 개발 △성장하는 시장(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러시아의 체계적인 입지 확보 등을 ‘세계 다수’에 대한 전략 방향으로 설정하고 있다.

보고서의 필자로 참여한 러시아 고등경제대학의 드미트리 트레닌 교수는 “타슈켄트 주재 러시아 대사가 파리 주재 대사보다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말로 러시아에서 ‘세계 다수’ 정책의 시급성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 다수’의 구심점 되겠다는 전략

이제 러시아에서 ‘세계 다수’는 복합적인 의미를 함축한 경향이고 담론이며 실천이다. 서구 주도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란 측면에서는 탈세계화 경향이지만, 민주적이고 공정한 국제관계의 원칙을 관철한다는 측면에서는 세계화2.0 전략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든 다극화 세계질서 구축으로 나아가는 대전환을 전제하고 있다.

러시아는 단지 ‘세계 다수’의 일원이 아니라 다극화 세계질서 구축 싸움의 선봉에 서서 군사적-정치적 구심점이 되고자 한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세르게이 카라가노프 교수는 이번에는 과거 소련 시기와 달리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구함으로써 나머지 세계, 즉 ‘세계 다수’를 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성원용 인천대 교수 동북아국제통상물류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