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선출된 대통령들은 후대 평가가 엇갈리기 일쑤지만 나름 기억에 남는 업적이 하나씩은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군 하나회 숙청과 금융실명제 도입이 꼽힌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 조기극복과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공을 세웠다. 노무현 대통령은 탈권위주의와 사회통합을 고집스럽게 밀었다. 부패혐의로 실형을 산 이명박 대통령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원만하게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기 중반기로 접어든 윤석열 대통령은 훗날 어떤 업적으로 기억될까. 윤 대통령은 지난 3일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탐사 결과가 나왔다”는 깜짝 발표를 했다. 도어스테핑 중단(2022년 11월 18일) 이후 끊긴 대국민 소통을 재개하겠다며 만든 국정브리핑 첫 작품이 ‘2200조원 석유·가스’였다. 윤 대통령 발표대로 ‘2200조원 석유·가스’ 매장이 확인된다면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경사일 수 있겠다.

하지만 ‘석유·가스’는 애당초 담당부처와 전문가의 영역이다. 대통령이 진두지휘할 국정과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대통령이 나선다고 해서 매장 확률이 높아지지 않고, 시장과 국민의 혼선만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취임 이후 최저 지지도를 기록한 직후 뜬금없이 ‘2200조원 석유·가스’를 발표하니 야권은 물론 다수 국민도 윤 대통령의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통령은 대통령이 할 일을 해야 한다. 국민에게 생색낼 일을 찾을 게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해 고뇌와 결단이 필요한 국정과제에 집중해야 한다. 윤 대통령 스스로 약속한 3대 개혁(연금·노동·교육)이 그런 국정과제에 속한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수십번 3대 개혁을 약속했지만, 지금껏 아무런 성과가 없다. 윤 대통령이 진정 3대 개혁을 원해 장관들을 채근하고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했다면 이렇게까지 제자리일까.

유승민 전 의원은 일찌감치 이 사태를 예상하고 1년 전인 지난해 6월 3대 개혁의 현주소를 맹비판했다. “지난 13개월의 취임 초 골든타임 동안 3대 개혁은 이룬 게 없다. 교육개혁은 만 5세 입학 사건 이후 대체 무슨 개혁을 했는가. 노동개혁은 69시간 이후 무슨 개혁을 했는가… 연금개혁은 정답이 뻔한 초등학교 수학 문제인데, 이 정부는 표를 의식하는지 시작도 안하고 있지 않는가.”

유 전 의원 비판 이후 다시 1년이 흘렀지만 3대 개혁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먼 훗날 ‘윤석열 대통령’을 떠올릴 때 ‘연금개혁을 통해 연금 고갈을 막아 미래세대의 노후를 지켜준 대통령’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게 욕심일까. 대통령이 지금 해야 할 일은 ‘2200조원 석유·가스’가 아니라 ‘개혁’이다.

엄경용 정치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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