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사용 늘어 전기요금 고지서 공포 … 누진제 폐지하면 한전 적자 심화

올여름 폭염이 지속되면서 에어컨 등 전력소비가 급증했다. 서민들의 전기요금 부담도 커졌다. 누진제 완화 등 전기요금 체계 개편 필요성이 고개드는 이유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전기요금 딜레마에 빠졌다. 누진제를 폐지하거나 획일적 요금감면을 단행할 경우 한전의 누적적자가 심화돼 채무불이행(디폴트)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렇다고 현행 체계를 고수하자니 다음달 청구될 전기요금 고지서 공포가 주택가를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먼저 이슈화 =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곽상언(더불어민주당, 서울 종로) 의원은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폭염에 전기요금 폭탄 – 누진제 이대로 괜찮은가’ 토론회를 개최한다.

곽 의원은 이날 특별발제를 통해 “누진 요금제는 일반 재화(물건)에 도입된 사례가 있지만 필수재화에 도입된 사례는 거의 없다”며 “또 경쟁사업자가 존재할 때 도입되기도 하지만 독점사업자의 경우 도입된 사례는 없다”고 주장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4년부터 현재까지 10년간 주택용 전기요금에 도입된 누진제의 위법을 다투는 소송을 진행해왔다.

앞서 여당인 국민의힘도 전기요금 체계 개편 필요성을 언급했다. 한동훈 대표는 최근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폭염기에 전기료 부담을 줄여드리기 위한 대책을 당정이 함께 논의할 것”이라며 “전기료 감면 법안을 여야가 합의해 민생법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재원 최고위원은 “2016년 폭염대책의 하나로 전기요금 누진제 완화 정책을 취한 바 있다”며 “전기요금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누진 구간을 일부 조정하는 등 취약계층이 시원하게 여름을 보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아직 전기요금 추가 감면이나 누진제 완화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

◆미국 일본, 한국보다 누진율 낮아 = 우리나라 전기요금에 누진제가 도입된 것은 1974년이다. 1973년 10월 1차 오일쇼크 발생으로 유가가 급등하면서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했다. 당시 중유발전은 설비 기준 65%, 발전량 기준 83%를 차지할 만큼 국제유가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누진제는 전기소비 절약을 유도하고 서민층을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시행됐다. 이때만 해도 전력사용량과 소득수준은 비례한다는 게 일반 정서였다.

1979년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나면서 누진율은 1.6배(1~3단계 차이)에서 19.7배(1~12단계)로 강화됐다. 이후 전력수급 상황과 여름철 냉방비 이슈 등을 고려해 10여차례 조정됐다.

2016년에는 여름철 폭염에 따른 누진제 논란이 제기되자 11.7배(1~6단계)에서 3배(1~3단계)로 대폭 완화했다. 2019년부터는 여름철 누진구간을 확대해 냉방비 부담도 추가로 줄였다.

전기요금 누진제를 시행하는 타 국가들은 대부분 한국보다 누진율이 낮다. 한전에 따르면 △홍콩(CLP) 2.2배(7단계) △중국(베이징전력) 1.6배(3단계) △일본(TEPCO) 1.36배(3단계) △캐나다(BC Hydro) 1.28배(2단계) △미국(PG&E) 1.26배(2단계) 등이다. 대만(TPC)은 4.72배(6단계)로 한국보다 누진율이 높다. 일본 캐나다 미국 대만은 계시별 요금제를 병행 시행하고 있다.

◆“1단계 단가 높이는 형태로 개선돼야” = 누진제를 찬성하는 경우 “합리적인 에너지소비 및 절약을 유도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또 “1~2단계는 원가보다 매우 낮은 요금수준을 적용하고 있어 서민 부담을 경감시킨다”고 주장한다.

반대의견은 “전력사용량이 많은 가구의 경우 1단계 대비 2.6배 높은 누진 3단계를 적용받아 요금부담이 급증한다”며 “주택용 전기요금은 누진제 외에 선택권이 없다는 점도 불합리하다”고 강조한다. 고소득 1~2인가구에게만 유리한 제도라는 지적도 설득력 있다.

이에 대해 정연제 서울과기대 교수는 “누진제 자체에 대한 옳고 그름의 논쟁은 무의미하고, 누진제 구조가 적절한지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며 “누진율 차이를 좁히는 게 필요한데 3단계 단가를 낮추는 방식보다 1단계 단가를 높이는 형태로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1단계 기본요금 단가가 (원가보다도)너무 낮아 전력공급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기본요금 조정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전기요금 정상화는 필요 = 한전은 “누진제 자체가 소비자 전기요금 부담증가 원인은 아니다”며 “대법원 판결도 전력수요 조절 등 누진제의 사회·정책적 필요성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누진제를 전면 폐지해 단일요금을 적용하면 현 1단계 단가보다 높고, 3단계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며 “저소득층 부담, 전력 과소비 증가, 부자감세 등의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한전은 2016년 누진제 완화(6단계 → 3단계)시 연간 9400억원의 수익이 감소했고, 2019년 여름철 누진구간 확대에 따라 연간 2800억~3700억원 소득이 줄었다.

특히 부채가 200조원 이상이고, 누적적자 40조원이 넘는 한전 입장에서는 전기요금 정상화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전채 잔액은 75조3000억원에 이른다. 한전채 발행한도가 87조6000억원인 점을 고려하면 향후 발행 가능한도는 12조3000억원 남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후 국제 에너지가격은 급등했는데, 국내 전기요금을 인상하지 않고 한전이 고스란히 떠안은 결과다.

한전은 최근 빚내서 빚을 갚는 악순환에 놓여있다. 따라서 △전력망(송변전설비) 구축 △협력회사 재무악화 예방통한 전력산업 생태계 보존 △과도한 한전채 발행으로 인한 금융시장 왜곡 방지 △비효율적 에너지 소비구조 개선 △국제 통상마찰 리스크 차단 등을 위해 전기요금 정상화가 유일한 해법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전기요금을 용도별로 정하기보다 공급전압, 부하패턴, 사용시간대 등에 따라 결정하는 게 합리적”이라며 “전기위원회의 독립성 전문성 투명성을 보장하는 등 전기요금 결정구조를 재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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