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교섭에만 맡기면 ‘불평등 악화’ 가능성 … 노동계 “국민연금개시 연령에 맞춰 법정정년 65세로 연장해야”
우리나라는 2016년 60세 정년을 의무화하는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령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이 시행된 이후 주된 일자리에서 조기퇴직 연령이 증가하고 있지만 노동시장에는 아직 60세 정년제가 안착되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의 법정정년은 60세로 같지만 정년퇴직률은 차이가 크다. 일본은 전체 기업의 90% 이상이 정년제를 운영 중이다. 60세 이전 조기퇴직하는 사례가 매우 낮다. 하지만 한국은 전체 기업의 22% 정도만 정년제를 운영한다.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연령이 49.2세다.
2013년 국민연금 개혁으로 국민연금 수급개시 시점이 60세에서 61세로 연장한 뒤 5년마다 1세씩 늘어나 현재 63세에서 2033년에는 65세가 돼야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정년 60세가 지켜지더라도 3~5년 소득공백(연금 크래바스)이 발생한다.
우리나라는 2025년 20.6%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2035년 30.1%, 2050년 40.0%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초고령화 가속화와 함께 여전히 노인빈곤율은 2023년 기준 40.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이 가장 높은 나라다.
노후준비가 안되면서 일하는 노인인구가 많다. 우리나라 남성의 실질 은퇴연령은 2018년 72.3세로 초고령사회인 일본(70.8세)보다 높다. OECD 국가 중 1위다.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해 어느 나라보다 더 오래 노동시장에 머물면서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종사한다. 소득공백 해소를 위한 정년연장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국민연금 수급개시 연령과 법정정년이 일치하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면서 “공적연금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민연금 수급연령과 정년의 불일치로 말미암은 소득공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정정년 논의가 빠진 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 신대양제지 노조는 2019년 설립됐지만 법에 따라 정년은 60세로 유지하고 노사는 단협을 통해 57세부터 1년차 15%, 2년차 5%, 3년차 5%로 25% 삭감되던 ‘임금피크제’는 폐지했다. 올해부터는 정년을 현재 60세에서 61세까지 연장하고 10% 임금을 조정하기로 협의했다. 노사는 63세 연장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67세까지는 촉탁직으로 재고용하고 있다.
#. 글로벌 자동차 부품종합기업 두올아산은 55세 이상 고령 근로자 비중이 60% 이상인 상황에서 정년을 연장했다. 지난해 노사는 정년을 62세로 늘렸고 필요 시 촉탁으로 63세까지 일할 수 있다.
#. 생활폐기물 수집 운반업체 성원환경은 2021년 60세, 2022년 62세, 2024년 65세로 단계적으로 정년을 연장했다. 성원환경은 50명 미만 중소사업장이다.
3개 노조는 “정년연장으로 고용·소득이 안정됐고 조합원 사기와 애사심도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정부가 4일 보험료율을 현재 9%에서 13%로, 소득대체율은 40%에서 42%로 올리는 국민연금 개혁안을 발표했다. 또한 국민연금 의무가입도 59세에서 64세로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소득공백 해소를 위해 65세로 법정정년을 연장하자는 논의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이날 한국노총은 더불어민주당 김주영·박홍배·서영교 의원들과 공동으로 ‘노동시장 인구구조 변화에 대응한 정년연장 입법방안 모색 토론회’를 열고 국민연금과 연계한 정년연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년연장, 꼭 청년층 고용기회 감소시키는 것 아니다 = 발제를 맡은 김성희 L-ESG평가연구원장은 “중소기업이나 불안정한 사람들은 법정정년이 늘지 않고서는 조기퇴직 압력에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다”며 “고령 근로자의 정년연장이 청년층의 고용기회를 반드시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노동시장에서 세대 간 협력을 촉진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원장은 정년연장을 노사 교섭에 맡기면 노동시장 불평등이 악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원장은 “대기업과 공공기관 근로자들은 지금의 교섭력으로도 65세 정년연장이 가능하다”며 “정년연장을 법으로 통과시키지 않고 교섭에만 맡기면 노동시장 불평등이 악화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모든 근로자들이 정년연장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정년연장을 하는 것이 필수”라고 밝혔다.
김 원장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국가”라며 “임시 일자리를 전전하는 것보다는 지금 일하는 데서 오래 일하는 게 노후소득의 사각지대를 없애는 가장 효과적인 해법”이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법정정년을 65세로 늘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업에 대한 강행 조항을 함께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법정 정년이 60세도 늘었지만 주된 일자리 평균 퇴직연령은 40대 후반인 상황”이라며 “65세로 법정 정년을 연장해도 강행규정이 함께 도입되지 않으면 중소기업은 근로자들에 대한 조기퇴직 압력이 커 지금처럼 근로자들의 실제 퇴직연령이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에 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법정 강행 규정으로 정년연장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도입할 때 불안정 노동자들에게도 좀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정부를 중심으로 논의되는 고령층 계속고용 방안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김 원장은 “정년폐지는 법정 정년제도가 잘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서 그 대상 폭이 훨씬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오고 퇴직 후 재고용 방안은 현재도 시행되는 방안”이라며 “법정정년을 65세까지 연장하는 방식이 보편적 혜택을 확산하는데 가장 가까운 방안”이라고 말했다.
◆고령자고용법상 고령자 연령도 60세로 높여야 = 노호창 호서대 법경찰행정학과 교수도 발제에서 “현재 법정정년과 국민연금 수급개시 연령 간 차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며 “연금수급연령이 단계적으로 높아지고 있으므로 노후소득공백을 해소하고 고령자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서는 정년을 연금수급연령에 맞춰 단계적으로 높여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노 교수는 “고령자고용법상 고령자 기준이 55세이고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상 무기직 전환이 요구되지 않는 연령도 55세로 정년 60세 의무화의 효과가 반감되고 있다”며 “고령자고용법상 고령자 연령을 60세로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 교수는 “연금수급연령에 맞춰 정년을 연장하는 입법 과정은 처음부터 법적으로 연장된 정년을 의무화할 수도 있고, 재고용·계속고용 방식을 과도기적 조치로 도입해 사회 분위기를 조성한 후 의무화하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방안도 검토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청년고용이 쉽지 않은 중소기업은 고령 노동자 계속고용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지만 인건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며 “중소기업의 정년연장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의 제도적 지원 대책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승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주된 일자리 고용기간 연장 정책의 효과를 높이려면 정규직으로 정년에 도달하는 근로자 규모를 더 확보해야 한다”며 “주된 일자리 이탈 고령자의 재취업 지원 확대 정책을 패키지 형태로 병행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사정 경사노위 논의에도 속도 붙나 = 현재 대통령 직속 노사정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인구구조 변화 대응 계속고용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 중인데 더욱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 논의를 바탕으로 하반기 중 ‘계속고용 로드맵’을 마련해 한다는 계획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에 맞춰 법적 정년을 연장하는 고령자고용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박홍배 의원은 “실제 초고령사회 진입 국가인 일본은 2020년 각 기업에 70세로 정년을 늘리는 노력을 해달라고 권했고 독일은 65세인 정년을 2029년까지 67세로, 스페인은 2027년까지 67세로 늘릴 계획”이라며 “우리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급격한 인구구조의 변화가 노동시장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서영교 의원은 “정년연장은 노동자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닌 인구가 줄어들고 고령자가 늘어날수록 필연적으로 고려해야 할 제도이며 젊은 층에게 새로운 기회를 박탈하는 것도 아니다”며 “개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하면 법제사법위원회에서도 빠르게 심사해 본회의에 상정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인사말에서 “우리나라는 연금과 정년의 사다리가 끊겨 노후소득 보호장치가 없는 현실”이라며 “가족 부양과 막막한 노후생계라는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정년연장은 매우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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