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폰·공인인증서도 손에 넣어

법원 "피해자 책임 없다" 판결

인터넷에서 구한 사진으로 신분증을 위조한 뒤 비대면대출로 수억원을 빼낸 사건이 발생했다. 범죄를 저지른 일당은 검거됐지만 명의 도용 피해자는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고된 싸움을 벌여야했다. 비대면금융의 민낯인 셈이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2019년 6월 이 모씨 일당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A씨의 개인정보와 사진을 다운 받은 뒤 운전면허증을 위조했다. 이 운전면허증은 알뜰폰을 개통하는데 쓰였고, 이씨 등은 위조 운전면허증과 핸드폰을 이용해 DB금융투자의 증권계좌를 개설했다. 계좌를 운영하기 위한 공인인증서 역시 위조 운전면허증을 통해 획득한 알뜰폰으로 발급받았다.

여기까지는 모든 준비가 마무리 된 셈. 하루 만에 위조 운전면허증과 알뜰폰, 증권계좌, 공인인증서를 확보한 이씨 일당은 다음날 카카오뱅크 앱을 다운로드받은 뒤 계좌를 개설했다. 일주일 뒤 1억5000만원을 대출 받았고, 다시 보름 뒤에 1350만원을 추가로 대출받았다.

카카오뱅크는 이씨 일당이 찍어 보낸 위조 운전면허증과 핸드폰 본인인증의 확인 절차를 거쳤지만 문제점을 잡아내지 못했다.

이씨 일당의 범행은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다시 SBI저축은행과 캐피탈업체를 통해 1억원 가까운 대출을 신청해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위조 운전면허증 사본과 카카오뱅크의 A씨 계좌, A씨 명의 공인인증서가 함께 사용됐다.

캐피탈업체는 추가 서류를 요구했는데, 이씨 일당은 위조 신분증으로 발급받은 카카오뱅크 계좌와 공인인증서 등을 통해 건강보험자격득실확인서와 건강보험 납부 확인서까지 제출했다. 이로써 위조 운전면허증이 만들어진 뒤 두달도 안 돼 이씨 일당이 대출받은 금액만 2억5050만원이다.

자신의 이름으로 수억대 채무가 발생한 것을 알게 된 A씨는 부랴부랴 법적 조치에 나섰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모든 채무를 갚아야 한다.

A씨는 "이 사건 대출 약정은 이씨 일당이 운전면허증을 위조하고, 임의로 공인인증서를 발급받는 등 개인정보를 도용해 체결된 것"이라며 "원고는 대출약정에 따른 채무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인을 구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카카오뱅크 등 금융기관들은 "대출 당시 A씨의 개인정보를 제공받고, 공인인증서 등을 통한 본인확인 절차를 거쳤다"면서 "대출신청서가 원고 또는 대리인의 의사에 기한 것이라고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어 적법하고 유효하게 체결된 대출약정"이라고 맞섰다.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36부(황순현 부장판사)는 A씨가 카카오뱅크 등을 상대로 한 채무부존재확인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대출약정은 이씨 일당이 위조한 운전면허증과 임의로 발급받은 공인인증서 등을 통해 원고 명의를 도용해 체결한 것"이라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권한 없는 자에 의한 계약이므로 A씨에게 효력이 없다"고 판결했다. 이어 "금융기관은 금융거래에 있어 본인 및 대리권 확인에 관해 일반인보다 고도의 주의의무가 있다"며 "비대면방식으로 거래를 진행하는 인터넷 전문은행에게는 거래 신속성과 편리성에 비춰 본인 확인절차에 더욱 주의를 기울일 책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A씨는 자신의 명의를 도용 당해 발생한 대출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1심 법원의 판단을 받아냈지만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소송을 진행하는 등 각종 불이익을 입었다. 변호사 비용에 소송비용까지 이씨 일당의 범행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A씨 몫이다. 아직까지 해당 금융기관 들은 법원에 항소하지 않은 상태다.

오승완 기자 osw@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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