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온라인매체 복스 "인구통계 변화, 팬데믹, 일에 대한 가치관 전환 등이 주요 원인"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될 무렵 미국 기업들은 노동자를 대량해고했다. 실업률은 대공황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치솟았다. 노동자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고 따라서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

그러다 미국정부의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으로 경제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고용주들은 필요한 인력을 구하기 힘들었다. '대퇴직시대'(the Great Resignation)로 일컬어지는 노동자 우위 시대가 왔다. 노동자들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일자리를 찾아 기존 직장을 속속 그만뒀다. 고용주들은 임금인상과 각종 혜택을 제안했다.

지난해부터 경기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많은 이들이 노동자 우위 시대가 곧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경제가 2분기 연속 위축되면서 경기침체 가능성을 보였고 인플레이션 폭주를 막기 위해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잇따라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미국 온라인매체 '복스'(Vox)는 26일 "하지만 미국경제는 계속 일자리를 늘렸다. 노동시장은 여전히 공급 우위의 상태다. 경제침체기에 들어선 경제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라며 "미국 일부 대기업, 특히 기술기업들이 수만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실업률은 5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 중이다. 한마디로 혼란스러운 시기"라고 진단했다.


구인구직 서비스 기업 '링크드인'의 경제·글로벌노동시장 책임자인 랜드 가야드는 복스에 "힘의 균형이 고용주 쪽으로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지만, 대체로 보면 여전히 노동자의 영향력이 더 큰 상황"이라고 말했다.

해고율은 팬데믹 이전보다 낮아졌다. 고용주들이 노동자를 붙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미 고용한 근로자를 잃는 것을 꺼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연초 기업의 대규모 인력감축에 대한 뉴스가 쏟아졌지만 해고율은 전체 고용의 1.1%에 불과했다. 비정상적으로 낮은 해고율을 기록했던 2019년 3월의 해고율과 동일했다. 여전히 실직자(퇴사든 해고든) 1명당 약 2개의 일자리가 열려 있다.

노동자들은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거나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면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고용주들이 자발적으로 임금을 인상하는 관행으로 이어졌다. 팬데믹 이전 일반적으로 3% 미만의 상승률을 보였던 임금이 지난달에는 전년 동월 대비 4.6%라는 놀라운 상승률을 기록했다.

노동자들은 또 '재택근무를 끝내고 사무실로 복귀하라'는 회사의 지시에 반기를 드는 경우가 많아졌다. IT리서치 기업 '가트너'의 인재연구 부장인 케이틀린 더피는 "많은 기업들이 사무실 복귀를 의무화하는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이 이를 준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철회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더피에 따르면 많은 기업들은 노동자를 강제로 복귀시킬 방법이 없다고 여긴다. 그는 "직원이 현장복귀 요구를 듣지 않을 경우 부정적인 결과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를 강제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기업은 14%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려는 노동자들의 의지는 보다 조직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코넬대의 자료에 따르면 2022년 파업 건수는 1년 전보다 52% 늘었다. 미국 노동총연맹산업별조합회의(AFL-CIO)의 리즈 슐러 위원장은 "노동자들은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며 계속 일어서서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인들, 특히 젊은층이 노동조합을 적극 지지한다. 스타벅스와 UPS, 교사들의 노조결성 캠페인 등에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과거에는 노조 결성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부문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슐러 위원장은 "라떼를 만들고, 식료품 진열대에 재고를 채우며, 소포를 배송하는 사람들이 '더는 못 참겠다'고 일어서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자 우위의 배경은

노동자들이 기존 직장을 그만두거나 파업을 하거나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많다. 하지만 그 중심엔 미국 고용시장이 여전히 뜨겁다는 사실이 있다. 미국경제는 2월 30만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연준이 노동시장을 냉각시키기 위해 금리를 계속 인상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상보다 높은 수치다.

링크드인의 가야드는 "미충원된 일자리가 있는 한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으며, 고용주는 이러한 일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동자들과 타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노동의 수급 불균형은 부분적으로 인구통계학적 변화 때문이다. 미국 상공회의소의 고용정책담당 수석 부사장인 글렌 스펜서는 "팬데믹으로 은퇴가 임박한 많은 베이비붐 세대가 조기은퇴를 하게 되면서 노동력 고령화라는 위기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고 말했다. 또 △팬데믹 초기 낮아진 이민율 △보건위기에 따른 육아문제로 인한 퇴사 △코로나19 감염으로 사망한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경제활동인구였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정서적 변화도 있다. 팬데믹이 제기한 위험에 많은 사람들이 직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면 직장을 유지하거나 그만두는 것에 대한 결정이 다소 쉬워진다. 가트너의 더피는 "40%에 육박하는 노동자가 지난 3년 동안 일이 덜 중요해졌다고 답했다.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일과 직장의 목적에 의문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팬데믹으로 고용주와 직원 간의 경제적 격차가 커졌다. 노동자들은 개인적 차원에서나 노조와 같은 집단적 차원에서나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됐다. 기업은 기록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는 반면, 일반인들은 저축 감소와 높은 물가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인플레이션 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코넬대 노사관계대학의 노동교육연구 책임자인 케이트 브론펜브레너는 "노동자들은 커진 빈부격차에 분노하고 있다"며 "고용주들은 늘어난 이익을 노동자들과 공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동자 우위의 다음 단계는

노동자 우위가 얼마나 오래갈 지는 부분적으로는 경제의 상태에 달렸다. 연준이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해 금리를 계속 인상함에 따라 일자리 성장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타격의 심각성은 연준이 경기침체를 유발하지 않는 '연착륙'을 설계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 인적자원관리협회의 최고인사책임자 짐 링크는 "심각한 경기침체가 발생하면 힘의 균형이 기업으로 더 많이 쏠리겠지만, 현재 상황은 역사적으로 이례적이기 때문에 그같은 변화가 얼마나 광범위할지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해고가 기술산업을 넘어 확대되고 일자리가 고갈되면 노동자는 선택의 여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지금보다 힘이 약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망은 미국 노동자들이 일에 부여한 가치가 달라졌다는 점을 고려치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지만, 이를 위해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은 예전과 달라졌다.

게다가 인공지능(AI)이나 머신러닝 등 신기술의 혁명적 발전도 고려해야 한다. 노동자의 업무방식은 물론 노동자의 역량을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몇주가 걸리던 코딩 프로젝트는 이제 새로운 기술을 통해 몇시간 내 완료할 수 있다. 프레젠테이션 작성이나 이메일 초안 작성 등 시간이 많이 걸리는 업무는 AI 비서에 아웃소싱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과 매우 유사한 응답을 생성하는 AI 소프트웨어 챗GPT와 같은 도구가 비슷한 일을 하던 노동자를 도태시킬지 아니면 노동자가 다른 일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하면서 기존 업무를 보강할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미국 상공회의소의 스펜서는 "기술이 노동자를 대체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늘 있었다"며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기술발전은 노동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수요를 창출한다"고 말했다.

하버드비즈니스스쿨의 테달 닐리 교수는 "기업에서 이러한 신기술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근무 장소와 시간, 대우 방식에 있어 유연성을 원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라며 "AI가 실제로는 노동자의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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