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배당금' 대신 '전쟁세' 부담 …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총 많다고 버터 줄지 않아"

냉전이 끝나갈 무렵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국방비 지출을 줄이면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1992년 "올해를 시작으로 해마다 영구적으로 감축되는 국방예산으로 진정한 평화배당금(peace dividend)을 거둘 수 있다"고 선언했다. 평화배당금은 군비를 축소함으로써 얻은 자원을 경제발전이나 사회복지에 쓸 목적으로 조성한 공적자금을 말한다.

전세계가 이에 주목했다. 미국은 1989년 국내총생산(GDP)의 6%를 국방비로 지출했지만 10년 뒤 약 3%로 줄였다. 그 후 9.11테러와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전쟁이 발생해 약간의 출렁임을 겪었다. 이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대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 갈등, 이란의 핵야망에 대한 긴장이 고조되면서 각국은 이번 세기 들어 그 어느 때보다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지난해 전세계 국방비는 실질기준으로 4% 가까이 증가해 2조달러를 넘어섰다. 전세계 방산기업 주가는 주식시장 일반보다 더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많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국들은 목표인 국내총생산(GDP)의 2% 또는 그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할 계획이다. 일본은 2027년까지 국방비 지출을 현재보다 2/3까지 늘려 세계에서 세번째로 국방비를 많이 지출하는 국가로 올라설 전망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새로운 국방공약과 그에 따라 예상되는 지출 증가가 실행될 경우 전세계적으로 매년 2000억달러 이상의 추가 국방비지출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상황에 따라선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 현재 연간 GDP의 2% 미만을 국방비로 지출하는 국가가 2% 수준으로 올리고, 나머지 국가들이 국방비를 GDP의 0.5%p씩 늘린다고 가정하면 전세계 국방비 지출은 연간 7000억달러 가까이 늘어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지난 4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지난 30년 누려온 평화배당금이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서방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한 반격에 나설 수 있도록 점점 더 정교한 무기를 더 많이 보내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9개의 새로운 기갑여단에 최신 전투탱크 등을 배치했다. 우크라이나 조종사들은 곧 미국산 F-16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을 예정이다.

2% 목표를 달성한 나토 국가 수는 2014년 3개국에서 지난해 7개국으로 늘었다. 나토는 이제 이 목표가 '천장'이 아니라 '바닥'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는 7월 리투아니아에서 열리는 정상회담에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일부 국가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폴란드는 올해 4%를 달성하고 궁극적으로 군대규모를 2배 늘릴 계획이다. 프랑스는 '전시경제'(war economy)로의 전환을 이야기한다.

아시아 군비경쟁도 격화되고 있다. 대만은 군복무 기간을 4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했다. 오커스(AUKUS)협정에 따라 미국·영국은 호주에 핵추진잠수함을 공급하고 극초음속미사일을 포함한 다른 무기 개발도 지원할 예정이다. 지난 10년 동안 인도 국방예산은 파키스탄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으로 약 50% 증가했다. 걸프만국가들이 다시 국제 무기시장의 큰손으로 등장했다.

중국 국방예산은 지난 10년간 실질기준으로 약 75% 증가했다. 중국은 2035년까지 기본적인 군대 현대화를 완료하고 2049년까지 세계 수준의 군사강국이 되기를 원한다. 미국 일각에서는 빠르면 2027년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1세기 가장 치열한 군비경쟁

냉전 이후 수십년 동안 '군비지출을 줄이면 인프라와 공공서비스에 더 많이 지출하는 한편 부채나 세금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1960년대 이후 전세계는 현재 물가 기준으로 연간 약 4조달러를 국방에 지출했다. 이는 전세계 각국의 연간 교육예산과 맞먹는 규모다. 이코노미스트는 "이제 각국의 군비경쟁으로 평화배당금이 '전쟁세'(war tax)로 바뀌고 있다"며 각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가 관건이라고 봤다.

하지만 어떤 나라가 무엇에 지출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건 어렵다. 국제적 비교를 위해 국방비는 일반적으로 시장환율에 따라 GDP 대비 비율로 계산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 군사비 지출은 GDP 대비 약 2.5%로, 냉전 이후 최저치에 근접한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대규모 방위시설과 이를 공급하는 산업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거나 경제성장을 둔화시켜 세계경제에 부담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하버드대 케네스 로고프 교수는 "국방부문과 관련, 대규모 일시적 지출을 앞당긴다면 차입비용이 쉽게 상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과도한 우려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신냉전이 큰폭의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다는 것. 이코노미스트는 "아무리 매파라고 해도 GDP 대비 국방비 지출을 1960년대나 1970년대 수준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며 "강대국 간 열전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세계 국방비 지출은 GDP 대비 한자릿수 하위 비율 이상으로 증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게다가 국방기술 현대화, 그에 따른 효율화도 한몫한다. 선진국 현대군은 그 어느 때보다 적은 인원을 요하기 때문에 군 계획자들은 군인 수를 줄일 수 있다. 브라질은 국방예산의 78%를 인건비로 지출하는 반면 서구의 지출비중은 50% 미만이다.

퇴역 공군대령으로 벤처캐피탈 회사 '럭스캐피털'의 고문인 제임스 거츠는 "예전엔 폭격기 수십대로 한개의 목표물을 타격했다면 요즘은 폭격기 한대로 수십개의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국방부문이 인터넷과 같은 첨단기술을 민간에 수출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반대현상이 더 많이 일어난다. 군수업계는 외부에서 첨단기술을 수입하고 있다. 사이버보안이나 드론, 위성기술이 그렇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스페이스X'는 미국 군사위성을 발사한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머스크의 스타링크위성을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기술기업들은 사이버보안, 데이터처리, 인공지능을 국방부문에 지원한다.

방산업체 스스로 기술적 역동성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세계 최대 방위산업체 록히드마틴 사장인 짐 타이클렛은 "과거엔 10년마다 새로운 비행기를 개발했지만, 이젠 6~12개월마다 성능향상을 위한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를 제공하면서 실리콘밸리를 모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위산업의 효율성이 개선되면 방위산업 호황이 재정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수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국방비 지출이 늘면 경제의 나머지 부분이 피해를 입는다고 주장한다. 2차세계대전 중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이 군수공장과 군부대로 끌려가면서 생산성 성장이 둔화됐다. 반면 전후 일본과 서독은 군사비지출을 강제로 제한한 결과 생산성이 크게 향상된 바 있다.

군비경쟁 양상, 미국에 달려

하지만 이는 과거의 일일 수 있다. 한국과 이스라엘 등은 경제와 국방을 결합하면서 경제적 파이를 크게 늘리고 있다. 즉 총(국방비)이 많다고 버터(민생예산)가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게다가 국방관련 연구개발(R&D)은 광범위한 혁신을 촉진할 수 있다. 국방역량에 대한 과감한 투자는 나머지 경제부문에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UC버클리대 엔리코 모레티 연구팀이 최근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정부가 지원하는 R&D, 특히 국방R&D는 특정산업 혁신에 대한 국가 총지출을 늘리는 데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전세계 각국은 인구고령화와 기후변화 대응, 부채에 대한 높은 이자지불 등 다양한 재정수요에 직면해 있다. 일부에서는 국방비지출 증가에 따라 세금인상이 불가피하며, 이는 미래세대에 부담을 전가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글로벌 군비경쟁의 폭과 깊이는 미국에 달렸다. 미국 주류는 여전히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고 러시아와 중국 모두를 제어하길 원한다. 반면 '미국우선주의'를 앞세운 포퓰리즘세력은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단하고 경우에 따라서 국방비 증액도 멈추길 원한다. 유럽과 중동에서 벗어나 중국에 집중하는 방향을 선호하는 이들, 국방비를 사회문제 해결 지출로 돌리려는 이들도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현재로선 국제주의 매파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라이벌에 맞서는 것은 초당적인 지지를 받는 몇 안되는 이슈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며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재무장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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